“먼저 아주 허황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게 되어 독자에게 미안하다. 지금껏 나는 삶이니 세계니 하는 것들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써왔다. 삶이 믿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판타지의 세계에 속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지만 적어도 나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만을 그리려고 애써왔다.”
소설가 전성태(46)는 최근 펴낸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창비) 말미에 수록한 단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를 이렇게 시작했다. ‘마음으로 겪고 눈으로 본 명백한 세계’만을 그려왔다는 그의 말은 리얼리스트의 태도를 웅변한다. 그러한 그가 아주 허황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건 어떤 맥락인가.
소설 속 화자의 어머니는 몇 년째 치매에 걸려 나날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차근차근 갉아먹다가 종내에는 자신마저 망실하는 병’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마치 휴대전화 액정화면의 배터리 표시처럼 지워져 가는 것 같다. 어머니가 그래도 유일하게 항상 반응하는 대목이 있다. “엄마!” 하고 부르면 “오야”라고 답하고, “밥 좀 줘” 하면 안타까워하는 말과 표정이다. 기억이 사라지다가 마지막에는 다섯 살, 세 살 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화자는 어머니와 소통하려고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라던 세상은 리얼리스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해명하기 힘든 ‘말랑말랑한 세계’였다.
2009년 이후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네 번째 창작집 ‘두번의 자화상’을 펴낸 소설가 전성태. 그는 “세 번째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지만 내게 질문이 멈추지 않아 독자와 더불어 나눌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이해선 제공 |
“요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주느라고 나는 일찍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애써 떠올려야 했다. 어떤 미동도 없이 먼 세계에 있는 듯 싶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한순간 어머니 눈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로동신문’에서는 새터민 임대아파트 경비원을 내세워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이의 아픔을 섬세한 관찰로 그려낸다. ‘성묘’도 분단으로 인한 현대사의 상처를 드러내는 단편이다.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는 물론 남파공작원들 유해까지 묻혀 있는 적군묘지. 무장 침투공작원 중 하나인 김광식 대위 묘 앞에 매년 같은 날 국화다발이 놓인다. 묘지 앞에서 버스를 타는 처녀 하나가 의심스럽지만 인근 가게 주인장은 모른 척하면서 빨리 그 꽃을 남모르게 치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가진다. 그래야 누군가의 성묫길은 계속될 수 있을 테니까. 남과 북, 좌와 우를 떠나 인간 그 자체를 포용하는 따스한 입김이 배어든 명편이다. ‘망향의 집’도 휴전선 접경지역에 사는 실향민 이야기다.
이 밖에 ‘국화를 안고’ ‘지워진 풍경’에는 피 흘리는 ‘광주’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고 ‘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에는 성장기의 기억이 싱싱하게 담겼다.
전성태는 “극적이고 큰 주제를 잡으려고 덤벼온 편인데 그런 태도로는 오히려 일상이라는 현실을 잘 못 보는 우를 범하기도 했던 것 같다”면서 “이제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을 잘 추슬러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1970년대 산업화 시기를 살다간 스포츠 영웅들 이야기를 장편으로 연재할 예정이라는 그는 “한때는 인생에 단 한 편의 소설만 제대로 남기면 된다는 문학청년 같은 생각도 많이 했다”면서 “문학도 나이를 먹어가는데 겸손하게 실패를 하면서 가는 게 작가의 길 아닌가 싶다”고 부연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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