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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가사키의밖에서일본을보다] 기노시타의 ‘경애하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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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02 21:18:43 수정 : 2015-03-02 21: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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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나의 고향은 나가노(長野)현 마쓰모토(松本)시이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빼어난 곳으로 이곳에는 자그마한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에 가 보았다. 언론인 기노시타는 1869년 9월 8일 마쓰모토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기독교를 알게 돼 일본 전체가 전쟁 열기로 들끓는 시대에 일관되게 전쟁을 반대하고, 금주·폐창(廢娼)운동에 참가했으며, 전쟁에 협조했던 주류 기독교를 비판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주간 헤이민(平民)신문에 ‘경애하는 조선’이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이색적인 글을 쓴 점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조선관(朝鮮觀)은 이와는 전혀 반대였다. 예를 들어 근대일본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일본 최고금액인 1만엔권 지폐의 얼굴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조선국을 야만국으로 평하기보다는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地獄國)이라 말하고 싶다”고 매도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후쿠자와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국민의 일반적인 조선관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들 논조에서도 조선의 상황에 동정하거나 격렬한 외세배척 운동을 벌였던 유학자를 비웃는 경우는 있어도 경애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야가사키 선문대교수·국제정치학
그런데 기노시타의 조선관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조선을 업신여기는 일본인에 대해 “조선은 일찍이 중국과 인도의 학예·기술·도덕·종교를 일본에 전해준 대은인인데 일본의 보답이라고는 침략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전론자(義戰論者)에게 묻는다’라는 글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을 한 최익현이 한일의정서에 반대해 용감하게 저항한 사례를 소개하며 “이래도 일본이 조선에 한 짓을 독립을 위한 의전(義戰)으로 미화할 수 있냐”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침략과 계급제도로 인해 고통받아온 조선민족이야말로 진정으로 초국가와 인류동포의 이상을 위해 전진할 소질이 있다”며 “언젠가 조선반도에서 평화를 불러오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애하는 조선’이라는 논설에는 서명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대표적 사회주의자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글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나는 고토쿠의 사상으로는 이러한 조선관이 나올 수가 없다고 여러 번 주장한 적이 있다. 다행히 많은 연구자의 실증적인 연구 결과, 이 논설이 기노시타가 쓴 글임이 증명돼 전집에도 실리게 됐다.

절대주의적 천황제를 비판하고 당시 정부의 군국주의를 반대했던 기노시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향의 시장과 교장들로부터 ‘기노시타를 낳은 것은 이 고장의 수치다’ 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이지만 퍼져나가고 있다.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요즘 이웃국가를 경애하는 중요성을 지적한 기노시타의 주장은 시대를 뛰어넘은 뜻 깊은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경애하는 관계가 된다면 ‘가깝고도 먼’이라는 한·일 관계도 ‘가까우면서도 가까운’ 한·일 관계가 될 것이다.

야가사키 선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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