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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위기의 프로농구' 구출 나선 김영기 KBL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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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03 19:29:00 수정 : 2015-03-03 19: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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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경기에 팬들 떠나… 새로운 변화로 옛 영광 찾을 것” 농구인으로 그리고 경영인으로 큰일을 해낸 한국농구연맹(KBL) 김영기(80) 총재는 ‘열혈 청년’이다. 1936년 1월생으로 산수의 나이를 맞았음에도 늘 열정과 에너지가 넘친다. 올림픽에 두 차례(1956년 멜버른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나 선수로 출전했고, 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국 농구계의 원로인 김총재는 1997년 국내 프로농구 출범 때 산파역을 맡았다. 초창기에 프로농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예전만 못하다. 10년간 재야생활을 하던 김 총재는 ‘한국프로 농구 구하기’라는 미션을 받고 지난해 7월 다시 KBL 총재에 추대됐다. 그는 프로농구를 빠르고 재미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팬들을 경기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묘안을 짜내기 위해 주말을 마다하지 않고 곳곳의 현장을 누비고 있다. 개혁을 이뤄 옛 영광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김 총재를 2014∼15시즌 프로농구 정규리그가 사실상 끝난 최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KBL 집무실에서 만났다.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를 10년 만에 다시 맡은 원로 농구인 김영기 총재가 3일 서울 논현동 KBL 집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농구를 통해 농구 붐을 재현하기 위한 변혁을 시도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지난해 7월 KBL 총재 취임 이후 맞은 정규리그 첫 시즌이 종착점에 달했다. 이번 한 시즌에 대해 평가한다면.


“총재로 취임했을 때에는 2014∼15시즌에 대한 제도 개선이 이미 상당히 이뤄진 상태였다. 크게 손을 보지 못했다. 속공저지 파울과 비신사적 파울에 대해 추가 자유투를 주고, 공격 리바운드를 공격자가 다시 잡았을 경우 공격제한 시간을 14초로 제한하는 등 룰 개정에 제한적이었다. 한 시즌을 돌이켜보면 변화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만족할 수 없다. 개혁과 변화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다시 농구 현장으로 오게 된 소명감이 있을 텐데.

“처음에는 개선하면 되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으나 막상 총재로 취임해 현안을 파악해 보니까 장애가 한둘이 아니다. 18년 전 프로농구를 창설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절박감이 느껴진다. 한국 프로농구를 인기 스포츠로 되살리는 게 나의 임무다. 외국 사례들도 살피며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농구 혁명의 원년이라 할 수 있는 2015∼16시즌은 인기몰이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기대해 달라.”

―지난 시즌보다 전체적으로 유료관중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할 것 같지 않다.

“작년까지는 관중 집계 방법이 발매 기준이었다. 공짜표도 많았던 만큼 허수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각 구단에게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행위는 하지 말자고 권유했다. 시즌이 완전히 끝난 뒤 정확한 관중 숫자가 나올 것이지만 지난해 118만명(270경기)보다 5%가량 늘은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좋은 농구 상품을 만드는 게 더욱 중요하다. 좋지 않은 상품을 팬들에게 사 달라고 권할 수 없지 않은가.”

―현재 국내프로농구 외국인 선수들은 지나친 장신화, 중량화 등으로 기술적인 묘미가 반감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외국선수들의 신장 제한이 없어 힘의 농구, 몸에 의한 ‘편한 농구’를 한 게 사실이다. 키와 힘을 앞세운 농구를 하니 국내 선수들도 딱히 배울 게 없다. 이러다 보니 토종 스타들이 죽었다. 외국인 선수 2명이 같은 쿼터에 투입되던 과거에는 국내 선수들의 평균 득점도 20점이 넘었다. 경기당 평균 득점도 93점이나 됐다. 외국인 선수가 1명만 투입되는 최근에는 평균득점이 73점에 불과하다. 외국인 선수가 쿼터에 1명만 뛰면 국내 선수들의 득점이 늘어날 줄 알았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오히려 크게 줄어들어 국내 선수들의 평균득점은 고작 15점 정도다. 무엇보다 상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기술농구를 해야 하고, 기술 있는 외국인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 이는 시대적 대명제다.”

―외국인 선수 2명의 동시 투입에 대한 반발도 없지 않은데.

“우리 선수들이 위축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절히 조절하겠다. 국내 선수들만이 뛰는 쿼터 도입 등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신축성 있게 조정할 예정이다. 외국선수들의 신장 제한도 고려대상이다. 물론 기술농구를 하고 구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다가오는 새 시즌에는 깜짝 놀랄 변화를 시도하겠다. 맹세한다.”

―총재는 19년 전 프로농구를 출범시킨 주인공이다.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환경 변화를 꼽는다면.


“19년전 프로농구를 처음 만들 때에도 주변에선 실패할 것이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의 인기를 염두에 둔 결과 프로농구는 성공을 거뒀다. 그렇기에 지금 강남에 KBL 건물(시가 700억원 상당)을 소유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10년간 떠나있다 다시 돌아오니 프로농구가 생존의 몸부림 없이 안주해 있더라.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그리고 앞으로 농구국제대회도 축구처럼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바뀐다. 필요에 따라선 대표팀 감독에도 외국인을 영입해야 한다.”

―3년의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일은.

“프로농구가 예전의 영광을 다시 찾도록 하는 게 나의 임무다. 재미있는 요소를 만들어주면 된다. 자신있다. 인기를 다시 끌어올리는 기초만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훌훌 떠나겠다. KBL 총재 자리에 결코 연연하지 않는다. 토대가 만들어지면 쉬고 싶다. 그게 소망이다. 10년 동안 해외여행도 많이 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각 구단 단장들이 KBL 총재에 추대한다길래 고사했었고, 결국 맡게 되서 집사람하고 말다툼도 있었다.”

―늘 천진한 미소와 열정이 넘쳐 보인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비결이 있나.

“똑바른 목적의식과 정열이 넘치면 건강은 쉽게 유지할 수 있다. 하루 만보걷기 외에는 딱히 운동이라고 할 게 없다. 야인으로 있을 때 매일 만보 이상을 걸었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시내에 약속이 있어 갈 때에는 시간에 쫓겨 차로 가지만 올 때는 반드시 지하철을 이용한다. 요즘에는 책상에 앉아 일을 많이 하다보니 만보 채우기가 힘들다. 기껏해야 6000보 정도다. 그래서 체중도 2kg 늘었다. 골프는 시즌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박수길 전 유엔대사 등 고려대 55학번 입학 동기들 하고 즐긴다. 필드에 나갈 경우 카트를 타는 경우는 절대 없다. 골퍼들의 로망인 에이지슈터(나이보다 골프 타수가 같거나 적게 치는 것)를 일년에 4∼5번 한다.”

―농구 인연이 60년을 넘었다. 농구인으로서뿐 아니라 체육계에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6.25전쟁 때 피란을 갔다가 수복한 뒤 학교(서울 배재고)에 와 보니 근처에 미군부대가 있었던지 낡아빠진 농구공 몇 개가 굴러다니더라. 코치도 없이 우리끼리 동호회처럼 농구를 했다. 당시에는 특기생 제도가 없어 시험을 치러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했지만 학점은 다 땄다. 학점을 다 따지 못해 한 학기 늦었다. 학점을 못 땄으니 늦는 게 정상이다. 그런 정상을 지키려고 했다. 은행 지점장으로, 신용보증기금 임원으로 신보창투 대표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정상’을 늘 덕목으로 삼았다. 40대 중반이던 내가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서 당시 대한체육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 함께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

―훗날 농구계에 어떤 선배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경기인으로서, 또 기업인으로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골프를 치면서 (어려운 위치에 놓인) 공을 슬쩍 터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예 그렇게 못한다. 이런 것을 모두 농구를 하면서 배웠다. 규칙을 배우고, 규칙대로 하자는 것을 배운 것이다. 경기인으로서 파울을 범하지 않고 룰대로 살아온 게 가장 큰 무기가 됐다. 대표팀 감독을 할 때에도 태릉선수촌에서 야간훈련을 하고, 아침에 은행으로 출근해 업무를 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후배들도 그런 길을 걸었으면 한다.”

대담=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 김영기 KBL 총재는 ▲1936년 1월 서울 출생 ▲서울 배재고-고려대 ▲1956년 멜버른 올림픽, 64년 도쿄올림픽 국가대표 농구선수 ▲제6회 방콕아시안게임(70년) 대표팀 감독, 제5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ABC·69년)감독 ▲KBL 부총재(99∼2002), KBL총재(2002년 11월∼2004년 4월) ▲제8대 KBL총재 취임(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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