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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붓질 회화 다시 살아나다

입력 : 2015-03-17 20:29:00 수정 : 2015-03-17 2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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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부터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전 뉴미디어와 대규모 설치작업이 주를 이루면서 미술의 중심에서 오랜 시간 멀어졌다고 치부되던 회화가 최근 전 세계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2013년 하반기 독일 베를린에서 ‘Painting Forever’ 전이, 영국에선 ‘Painting Now’ 전이 열렸다. 2014년에는 미국에선 ‘The Forever Now’라는 대규모 회화전이 개최됐다. 국내에서도 현대회화의 흐름을 살펴보는 몇몇 기획전이 열렸다. 삼성미술관 플라토가 이런 추세에 맞춰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작가들을 통해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 전을 19일부터 6월7일까지 연다. ‘회화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는 요즘 역설적으로 ‘회화의 기원’으로 돌아가 매체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박물지’(77년)에서 그리스 코린토스지역의 부타데스라는 도공의 딸이 곧 떠나갈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린 것이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고 기록했다. 이 일화는 오늘날 선포된 ‘회화의 죽음’만큼이나 하나의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디지털 영상 기술의 발달로 무한한 이미지가 생산·소비되는 이 시대에 매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사유해보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회화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재탐사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여인’의 전설은 회화를 단순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 시각뿐 아니라 더욱 폭넓은 ‘감각’의 행위로서 바라보게 해준다. 

인상주의에서부터 신표현주의까지 모든 사조를 차용하면서 대담하고 새로운 표현들을 드러내고 있는 미국의 데이나 슈츠의 ‘싱어송라이터’.
회화와 그림자의 관계는 서양미술사뿐 아니라 우리의 고유 문화에서도 순수우리말로 ‘그림’과 ‘그리다’ 그리고 ‘그림자’가 그 어원을 같이 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림자의 상징성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출신 12명의 작가들이 디지털이미지부터 레디메이드까지 무한히 확장하고 있는 현대회화의 맥락에서 붓과 물감, 그리고 캔버스로 이루어지는 가장 전통적인 ‘붓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우선 정보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다양한 분야와 역사를 쉽게 가로질러 나름의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미국의 헤르난 바스는 데카당스 문학과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며 무한한 내러티브를 풀어내고 있다.

영국의 리넷이아돔 보아케는 서양미술사의 초상화 전통을 끌어들인다. 미국의 데이나 슈츠는 인상주의에서부터 신표현주의까지 모든 시대를 차용하면서 대담하고 새로운 표현들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브라이언 캘빈은 생동감을 불어넣는 세심한 붓질로 실제하지 않는 상상의 인물 초상화를 만들어 낸다. 허구적 인물화들은 마네와 세잔 등 과거 거장들의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암시하며 서양미술사의 초상화 전통을 참조한다. 한국의 백현진은 붓질이야말로 내면의 감성을 표현하는 ‘촉각적 감각’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현상은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생겼다. 사람들은 디지털 이미지 홍수 속에 회화의 위기를 예견했지만 많은 동시대 작가들은 다른 이미지 매체로 대신할 수 없는 회화만의 특성으로 시간과 기억의 표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리송송에게 역사란 항상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미디어 매체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불규칙한 그리드로 나누어 강조와 삭제를 모순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루마니아의 셰르반 사부는 모국의 평범한 일상을 촬영하고 포토샵을 활용해 회화적으로 재구성한다. 오래된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빛바랜 톤은 미묘하게 과거를 회상하게 하며, 현재에 여전히 맴도는 실패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준다. 폴란드의 빌헬름 사스날은 미니멀한 스타일에서 극적인 표현주의적 붓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유롭다. 사진적 이미지를 회화로 전환하는 한국의 박진아는 동시대 삶의 순간들을 결합해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을 시각화하고 있다.

일군의 작가들은 디지털이미지를 활용해 새로운 표현을 모색하기도 한다. 회화를 전통적인 재현에서부터 접근하여 새로운 전략을 시도한 작가들도 있다. 영국의 질리안 카네기는 다양한 회화적 기법을 동원해 물감의 물질성을 극대화한다. 미국의 조세핀 할보슨은 사물의 시각적 느낌보다 촉각적인 느낌, 더 나아가 작가가 느낀 본능적인 인상을 회화로 옮긴다. 영국의 케이티 모란은 재현과 추상이란 두 개념의 상호작용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증명한다. 자신의 회화를 의도적으로 작고 친밀한 사이즈의 캔버스로 제한하여 그리는 작가는 재치 있고 유희적인 작품 제목으로 관객에게 그림 속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하게 한다.

회화의 근본뿌리에서 출발해 동시대 회화작가들의 다양한 모색을 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들은 물론 미술애호가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전시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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