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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그림 통해 예술의 원초적 유희 되찾았다”

입력 : 2015-04-07 20:51:51 수정 : 2015-04-07 20: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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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화두로 소통 그리는 안상진 작가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리듬을 갖고 살아간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그 리듬이 잘 맞지 않아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이란 서로 리듬을 맞추어 가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듬을 맞추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말’로만 시도하다 보면 ‘말뿐’으로 그치게 마련이다.

어린아이와 소통하기 위해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최고다. 리듬을 맞추는 가장 좋은 방법이 놀이라는 얘기다. 어른도 예외가 아니다. 소통을 꿈꾸는 예술가들이 놀이에 주목하는 이유다. 그러기에 놀이, 소통, 예술은 ‘삶의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안상진(49)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중학생 딸과의 소통이 참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국내 최초 ‘교내 갤러리’를 연 대전 호수돈여고 홀스톤 갤러리에서 ‘딸을 위한 놀이터’전(10일∼5월8일)을 연 계기가 됐다. 

보석과 말을 그린 딸아이의 그림을 따라 그린 작품. 환상적인 꿈이 넘실거리는 풍경이다.
“몇 달 전 암수술을 마치고 딸아이의 그림들을 정리하게 됐어요. 심심할 때 그리라고 책상 한켠에 늘 스케치북을 놓아주었는데 그것이 엄청난 양으로 쌓였지요. 그동안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는데 한 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큰 뜻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그림을 정리하다 보니 뭔가 보였다. 바로 옆에 있어도 잘 알지 못했던 딸의 이야기, 상상, 그리고 꿈이 거기에 있었다. 기껏해야 A3 크기밖에 되지 않는 스케치북이었지만 딸에게는 가장 넓은 놀이터였던 것이다.

“딸의 놀이를 이해하는 일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딸아이의 유아기 그림 중에는 무엇을 그리려 한 것인지 짐작도 안 되는 것도 많았어요. 처음에는 혼자 이리저리 고민하고 해석해봤지만 역부족이었지요.”

그는 결국 아이 ‘놀이(그리기)’를 통해 아이의 ‘놀이(그림)’을 이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예 ‘딸을 위한 놀이터’라는 전시를 마련했다.

“딸은 저의 딸을 뜻하기도 하지만 호수돈여고의 여고생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딸’은 모든 부모의 딸들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관객’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죠.”

전시장 초입에는그의 딸(안성민)이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이 내걸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비틀린 통로가 마주한다. 몸을 움직여 통과하다 보면 전시장이 놀이터가 된다. ‘딸을 위한 놀이터’는 ‘놀이터’이면서 동시에 ‘작품’이다. 그것은 마치 사티의 ‘가구음악’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한 ‘놀이터 작품’이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리듬’입니다. 딸의 리듬에 무관심했고 무지했기에 딸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딸의 그림을 저의 리듬으로 너무 빨리, 또는 너무 멀리서 본것이지요.”

‘딸을 위한 놀이터’를 통해 창작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안상진 작가. 그는“딸아이 작품 따라하기를 통해 예술의 원초적 유희성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그가 딸과의 어긋난 리듬을 맞추기 위해 ‘놀이’를 택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놀이란 함께 놀며 상대와 리듬을 맞추어가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행위다. 딸의 리듬에 맞춘 놀이터를 만들고, 그곳에서 딸의 그림과 함께 놀며 딸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다.

“딸의 놀이를 통해 저 자신의 놀이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림 그리며 놀아본 게 언제였던가? 문득 수많은 규칙을 알고 있는 저 자신이 정작 가장 중요한 규칙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놀이의 규칙’말입니다. 저도 딸아이 처럼 그림 그리고 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것이 좋아 미대에 들어갔고 예술가가 된 것인데, 다시 돌아보니 그 즐거움을 어느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놀이’를 망각했거나, 망각해가고 있다. 놀이를 삶의 중심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루어야 하는 목적들과 그것을 위한 강도 높은 노동이 하루하루를 채워가다 보면 놀이가 잊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선 다시 ‘규칙’의 습득이 필요하다.

“저는 놀이를 기억해 내기 위해 딸아이의 그림을 따라 그렸습니다. ‘따라 그림’의 선택이었지요. 잊고 있던 놀이의 감각을, ‘규칙’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 입니다.” 전시장 그의 작품들은 딸아이 그림을 따라 그린 것들이다. 예술의 원초적 유희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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