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치매 걸린 아버지의 삶 담담히 그려 큰 울림

입력 : 2015-04-11 00:56:51 수정 : 2015-04-11 00:56:5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아르노 가이거 지음/김인순 옮김/문학동네/1만3000원
유배 중인 나의 왕/아르노 가이거 지음/김인순 옮김/문학동네/1만3000원


“처음에는 충격, 비통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 끝났구나 그 병이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갈 것이다 다시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삶의 끝 또한 삶이라는 것을….”

신간 ‘유배중인 나의 왕’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노 가이거가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는 아버지와의 삶을 기록한 자전적 소설이다. 치매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께 한 일상을 담담히 그렸다.

2011년 발표된 소설은 서유럽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가정이라는 사회 기초 단위가 깨져가는 서유럽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소설은 신선했다. 독일 일간 디 벨트지는 톱기사 서평을 통해 “병든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사랑의 보고서”라고 평했다. 이 책으로 저자는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상 후보에 올랐고 요한 베어 문학상을 받았다. 저자는 1997년 데뷔 이래 각종 상을 휩쓸면서 독일어권 문단에서 유명 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저자의 섬세한 인간심리 묘사는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도 흥미롭게 읽히도록 한다. 죽음과 치매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비극적이거나 우울하지도 않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가족 간 애정을 표현하는 글솜씨가 돋보인다.

작품에서 작가 스스로가 주인공이다. “아버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독일에 합병된 지 몇 년 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징집되었다. 패전 후 러시아군 포로로 잡혔다가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귀향한 후에는 대학에 가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겠다는 전쟁 전의 계획을 뒤로한 채 면사무소에 서기로 취직한다. 결혼을 하고 손수 지은 집에서 네 자녀를 길러낸 아버지는 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다 조용히 은퇴한다. 어머니와 별거를 겪은 뒤 마치 마음속 마지막 용수철이 튕겨나간 듯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았다. 자식 중 아무도 그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알츠하이머병이 아버지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어떤 삶의 질곡에도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었던 강인한 아버지가 치매로 쇠약해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어느 자식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울 때는 자포자기에 빠진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치매는 너무 가혹했다. 고뇌에 찬 나날을 보내던 중 저자는 아버지의 현실을 인정하고 조금씩 적응해나간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밤중에 난데없이 거리를 헤매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을 지니려고 노력한다.

저자 아르노 가이거가 아버지와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슈피겔 제공
책 제목 ‘유배중인 늙은 왕’은 실생활에선 멀어졌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제목이다.

알츠하이머병, 즉 치매는 흔히 고통과 상실, 혼란과 갈등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노령화 사회에서 치매 환자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저자는 발병부터 진행과정, 요양원에서의 최후를 다루면서 ‘삶의 끝 또한 삶’이라는 인식에 다다른다. 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노년과 치매에 대한 성찰,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