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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획 한획 베푸는 즐거움, 한지 위에 가득 펼쳤지요”

입력 : 2015-04-28 20:25:39 수정 : 2015-04-28 20: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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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까지 동남아 오지 어린이 돕기 서예전 여는 월서 스님 “올해 내 나이가 80인데 주변에서 선후배들이 입적하는 것을 보며 제행무상(諸行無常)과 함께 나의 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이 느껴져요. 그래서 좋은 일을 한 가지라도 더하고 싶었습니다.”

29일부터 내달 5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동남아 오지 학교 건립 및 장학금 조성을 위한 산수(傘壽·팔순)전’을 여는 충북 보은 법주사 조실 월서 스님은 “글이 완성됐다고 볼 수 없고 자신감도 결여됐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며 이같이 심경을 밝혔다.

추사 선생의 서풍을 오롯이 잇고 있는 월서 스님은 2007년 처음으로 북한동포와 외국인 노동자 돕기 서예전을 열었다. 이번이 두 번째 전시회다. 산수전에는 월서 스님이 쓴 서예작품 400여점과 서암, 구산 등 큰 스님들이 기증한 서예작품 30점 등 모두 430여점이 전시된다. 월서 스님 작품에는 원효, 영가, 효봉, 동산, 청담 스님 등 고승들의 오도송 60점과 명언, 명구 등이 담겨 있다. 월서 스님은 자신의 실력이 함량 미달이라고 몸을 낮췄으나, 동석한 원로 서예가 구당 여원구 화백은 “꼭 추사가 쓴 것 같다”며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뼈 없이 살만으로 쓴 글씨는 기운이 생성되지 않는데 월서 스님의 글에는 뼈가 있어 기운이 느껴지고 서격이 높다는 것이다. 

월서 스님이 추사체로 ‘상낙아정’이라고 쓴 족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나이 80은 인생의 종착역으로 좋은 일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고 많이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예는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데, 제가 추구하는 것은 서도(書道)지요. 서도는 수행과 묵향이 접목돼야 하는 험한 길입니다.”

월서 스님은 1985년 경주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마치고 서예가 운남 스님으로부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쓰기가 어려워 중도에 몇 번씩 포기했다고 한다. 서도는 아주 고독하고 외로워야 들어설 수 있는 고난의 길이었다.

“글을 쓰며 몸과 붓이 하나가 되는 삼매(三昧)에 들 때는 하루 2시간만 자도 몸이 거뜬하지요.”

무심코 글을 쓰다가 ‘금강경’ 5400자의 대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서예가라면 마땅히 도전해야 할 관문이었다. 월서 스님이 오랜 기간 붓과 씨름하면서 추사체를 60%가량 완성했다고 생각할 무렵인 2007년 종단 대표로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북한동포들, 특히 어린이들의 핏기 없는 얼굴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서예전을 열어 도움을 줬다.

이번에도 미얀마 바간시 옆의 시틴 마을을 방문해 책 없이 공부하는 오지 어린이들을 봤다. 처음에는 책을 보내주었으나 좀 더 비전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화엄경 보행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좋은 일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정도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가르침이 큰 채찍이 됐습니다.”

월서 스님의 은사는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요, ‘지리산 호랑이’로 알려진 금오 스님(1896∼1968)이다. 6·25전쟁 때 지리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실상사 약수암에서 금오 스님을 처음 만나 생사문제를 논의하던 중 “이 세상에 나고 죽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한마디에 꽂혀 불교에 귀의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상대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눈매가 매웠다고 한다. 그것은 오로지 제자들의 바른 수행을 위해서였다. 월서 스님 역시 ‘조계종 군기반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올곧은 수행의 길을 걸었다.

“후원금과 기부금을 받아 이웃을 도울 수도 있지만, 선행을 한다고 하다가 자칫 업을 지을 수도 있어 혼자 힘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아요.”

스님이 좋아서 많이 썼다는 글귀는 ‘처염상정(處染常淨)’과 ‘상낙아정(常樂我淨)’이다. ‘아무리 더러운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음’과 ‘청정함을 통해 기쁨을 얻음’은 수행자의 본분이요, 누구라도 마음에 새기면 고통을 물리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20일 동안 밤낮없이 매달려 글을 쓰다 보니 몸이 상해 붓글씨를 더는 못 쓸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는 스님에게서 손주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는 할아버지 모습이 느껴졌다.

글·사진=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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