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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 벽돌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인 절대군주의 사랑

입력 : 2015-05-25 13:32:54 수정 : 2015-05-25 13: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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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18> 타지마할  
# 정릉과 조선 태조의 아내 신덕왕후

정동(貞洞)은 원래 조선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동네이다. 왕조실록에 전하는 바로는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하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영국대사관 부근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원래의 정릉은 태종 때 도성 밖의 사을한(沙乙閑)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이 성 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인 태평관(太平館)에 가까우니 성 밖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능이 옮겨진 동네가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이고, 정릉이 있던 동네는 정동이 된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가 무척 사랑했던 아내였던 까닭에, 건국의 과정에도 참여했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런 아내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정릉 앞에 흥천사라는 절까지 지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돌봤고, 직접 제를 지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덕왕후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과 무척 사이가 나빴다. 신덕왕후가 태조의 사랑을 바탕으로 정도전과 결탁하여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앉혀놓은 일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신덕왕후가 죽고 1년 후,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으며 신덕왕후의 소생들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왕이 된 태종의 눈에 궁의 코앞에 있는 정릉은 아무래도 눈엣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태종 6년에 정릉의 영역이 너무 넓다며 100보 밖으로는 집을 지어도 좋다고 허가하여 신료들이 앞다투어 근방에 집터를 잡게 되었다. 결국 태종 9년에 이르자 정릉을 이전시켜버리고 정자각을 헐어 태평관 북루를 짓는 데 보태게 한다. 심지어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고까지 명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다음해에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나오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정릉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정부에서 건의한 것으로 나오지만 일국의 왕후 능터에 있던 부재들을 갖다 쓰는 일이 왕의 사전 허락 없이 계획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 바람에 정릉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진다. 태종의 이런 태도는 조선 내내 이어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얼차별의 관습으로 이어진다.

원인을 따지자면 태조에게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한씨와 경처(京妻) 강씨 두 아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원 형제의 모친인 한씨는 건국 1년 전에 세상을 떠나 조선의 첫 왕후는 강씨가 된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강씨의 아들들은 서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으나, 정종이나 태종 입장에서 볼 때는 아버지의 강씨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길 뻔했으니 한을 품을 만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태조의 입장에서 보면 멀리 고향에 있던 향처보다 개경에서 함께 고락을 나눈 아내에게 사랑을 쏟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편애가 자식 간의 상잔이라는 파국을 불러오고 비록 이전했다고는 하나 아내의 무덤을 훼손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될 줄은 미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 심벨 신전의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한 신전.
# 아부심벨 신전과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

대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나 왕들의 곁에는 미인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항우의 곁을 지킨 우미인이나 히틀러와 함께 자살한 에바 브라운 같은 의리의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은나라의 달기나 주나라의 포사, 오나라의 서시 같은 여인들도 있다.

나라가 망할 정도는 아니라도 국력이 기울 정도로 공을 들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던 지배자들이 역사에 꽤나 자주 등장한다. 이집트 최고의 치세를 이끌었다는 람세스 2세(Ramses II,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제3대 왕, 재위 BC 1279∼BC 1213)에게는 수십명의 여인이 있었지만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네페르타리는 우리가 잘 아는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 아멘호텝 4세의 아내인 네페르티티와 함께 이집트 3대 미녀로 손꼽히는데, 이름 자체가 미인 중의 미인을 뜻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성경의 ‘출애굽’ 당시의 지배자로 추정되기도 하는 람세스 2세는 60년이 넘게 왕위를 지키며 이집트의 정치적, 문화적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집트 전역에 신전 등 수많은 건축물과 석상들을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곳이 아부 심벨(Abu Simbel) 신전이다. 

네페르타리 무덤 내부. 화려한 색채를 띤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하다.
바위 산을 깎아 만든 이 놀라운 신전은 입구에 22m 높이의 석상 네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의자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주인공은 물론 람세스 2세이고, 그 발치에 왕비와 왕자들의 석상들이 서 있다. 누가 봐도 범접할 수 없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도라 할 수 있다.

아부 심벨 신전에는 람세스 2세를 위한 태양 신전과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한 ‘아부 심벨 소(小) 신전’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가 세운 수많은 건축물이나 기념물 중 여인을 위한 것은 네페르타리에 대한 것뿐이었고, 네페르타리 신전 앞에는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신전은 1960년대 초반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길 뻔한 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1964년부터 4년간 유네스코의 주도로 세계 50여개국에서 자금을 모아 신전을 원래 위치보다 62m 높은 곳으로 이전했고, 아부 심벨 신전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1904년에는 이집트 남부 룩소르의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네페르타리의 무덤(QV66)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크고 화려했다. 약 420㎡ 넓이의 지하무덤은 대부분의 고대 유적들이 그렇듯 발굴 당시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염분이 석회석 벽을 침투해 벽면의 회화를 부식시킨 데다 나일강의 범람 때 밀려들어온 토사가 1m가 넘게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보수된 사진을 통해 본 내부는 화려한 색채를 띤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하다. 당장 그림에서 사람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생생함은 정성 들여 왕비의 무덤을 건립한 왕의 사랑뿐만 아니라, 당시 아시아와 이집트 주변 국가들을 아우르며 융성한 제국을 이뤘던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 타지마할과 인도 무굴 제국의 왕 샤 제한

인도 아그라 남쪽에 있는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이다. 물론 아주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완벽한 형태와 색채 그리고 건물 앞으로 길게 드리워진 물길의 조화는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천상의 어떤 낙원의 이미지와 크게 부합된다.

어린 시절 타지마할의 사진을 보곤 꿈에 나타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집은 사실 무덤이다. 말하자면 왕이 사는 궁전이 아니라 영혼의 궁전이며 그것도 한 사람을 위한 궁전이다. 근세의 인도를 통치했던 무굴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무굴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칭기즈칸, 티무르의 후손이 1526년에 세운 나라이다. 그들은 인도 북부를 장악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웠는데, 무굴이라는 말은 힌두인들이 북부의 이슬람인을 부르는 통칭이라고 한다. 나라를 세운 이는 바부르라는 사람인데 그는 티무르 쪽 부계와 칭기즈칸 쪽의 모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바부르라는 이름은 몽골인의 별명으로 ‘사자’라는 뜻이고, 그의 본명은 자히르드 딘 무하마드이다. 몽골인의 피를 물려받은 바부르는 정말 사자처럼 용맹했다고 전해진다.

무굴제국의 왕 샤 제한이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지은 타지마할. 20년 동안 2만명을 동원했고, 당시의 모든 기술과 예술을 쏟아부었다.
그는 15살에 티무르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사마르칸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 용맹심만으로는 되는 일이 아닌지라,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며 여러 차례의 고비를 넘기면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사마르칸트는 얻지 못했으나 파니파트 전쟁에서 승리하여 인도의 델리를 정복하고, 그곳에 무굴왕국을 세운 뒤 4년 만에 그의 아들 후마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러나 ‘사자의 아들’ 후마윤은 아버지만큼 용맹하지 못해 12년간 나라를 뺏기는 위기를 겪다가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되찾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무굴제국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본명은 무하마드이나 후에 ‘위대한 왕’으로 불리는 악바르(1542∼1605)이다.

그는 칭기즈칸과 티무르, 바부르의 장점을 모두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치세하에 40년이라는 무척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과감한 포용정책으로 나라를 융성하게 하였으며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무굴제국은 짧은 오르막 후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의 통치가 끝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악바르의 아들 제항기르는 왕위 찬탈을 공공연하게 꾸미다가, 왕이 죽자 그날 저녁 바로 상복을 벗어던지고 왕으로서의 권한을 누렸으나 그렇게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시 아들 샤 제한의 공공연한 왕위 찬탈 시도를 봐야 했다. 그리고 샤 제한이 왕이 된다.

샤 제한은 ‘세계의 왕’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며, 그가 바로 타지마할을 지은 사람이다. 그는 악바르 이후 지속되어왔던 종교적 관용에서 벗어나 이슬람 중심으로 나라를 재편했다. 그러한 정책기조 위에서 무수한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었으나 샤 제한은 사라진 힌두교 사원보다 많은 이슬람 건축물을 축조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그가 25세에 결혼해서 18년 동안 같이 살며 14명의 자녀를 가졌으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의 묘지이다. 그는 타지마할을 건축하기 위해 20년 동안 2만명의 인원을 동원했고, 당시의 모든 기술과 예술을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이 건축물은 마치 하나의 문화적인 타임캡슐과도 같다.

완벽한 좌우대칭과 때가 하나도 묻어나지 않은 것같이 순수한 색상이 환영처럼 땅 위와 물 위에 신비롭게 드리우고 있는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묘 건물 건축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켜 그 절정을 이룬 인도의 이슬람 건축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끝내 샤 제한 또한 마치 가문의 전통처럼 아들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다. 그가 집권한 지 30년이 되는 해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한다. 그리고 샤 제한은 악바르가 지었다는 ‘붉은 성’ 아그라 요새의 감옥인 재스민 타워에 감금되어, 야무나 강 건너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사연은 같지만 결과는 달랐다. 타지마할이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유산으로 남았다면, 아부 심벨 사원은 무지막지한 건설 세력에 의해 물에 잠길 뻔한 위기를 넘겨야 했고 정릉은 이름으로 남았다. 새로운 왕조를 열거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권력자들이 사랑하는 이의 무덤을 당시 최고의 기술과 예술을 동원해 지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내세우되 한편으로 그들의 관용과 여유를 상징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될 뿐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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