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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주의 깬 작가 발굴… 문단의 새 판 열겁니다”

입력 : 2015-05-21 19:56:09 수정 : 2015-05-21 19: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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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만에 출판계 복귀한 문학평론가 임우기
침체된 소설 작단을 깨울 새로운 기획출판 시리즈가 출범했다. 문학평론가 임우기(59)씨가 대표인 솔출판사의 ‘소설판’ 총서가 그것이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전 16권을 완간하고 이문구 소설 전집을 처음으로 기획한 것을 비롯해 김소진의 소설을 태동시킨 왕년의 문학명가가 소설 출판을 접은 지 10여년 만에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이다. 임우기씨는 “상업주의적 의식을 버리지 못한 채로 대중들의 낡은 감각과 의식에 호소하는 기존의 소설 의식을 타개 극복하고, 현실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린 진정한 이질적 개성의 소설 문체의식, 고유한 창작정신을 발굴하고 이를 뒷바라지하는, 새로운 소설 시리즈로서 ‘소설판’ 총서를 기획 출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첫 작품은 소설가 김문수(1939∼2012)의 소설 선집 ‘비일본계(非日本界)’다. 충북 청주에서 출생한 김문수는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풍자와 유머를 동원해 서민들의 삶을 밀착해 그렸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비일본계’는 그가 타계하기 전에 발표한 유고작이다. 한자의 의미 그대로 ‘非日本界’는 ‘조선지계(朝鮮之界)’라는 의미로 조선시대의 어부 안용복(安龍福, 1658∼?)이 대마도로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웅변하고 일본 에도 막부의 관백으로부터 서계(공문서)까지 받아온 역사적 사실을 뼈대로 집필한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안용복이 서계를 품고 귀국하던 조선 숙종 19년(1693년)이야말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 조선의 땅임을 분명하게 공식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안용복은 조정의 허락 없이 국경을 넘나들었다는 죄목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유배까지 당했다. 작가는 40여년 전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안용복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뒤 일본의 연이은 망언에 자극받아 사명감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2012년 타계한 소설가 김문수.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 안용복의 활약을 다룬 유고작이 소설 선집으로 묶였다.
솔출판사 제공
이번 소설 선집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만취당기’도 수록됐다. 1989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정승 세 명이 나온다는 명당 터임을 굳게 믿은 ‘만취당’의 주인이 어쩔 수 없이 빼앗기다시피 집을 팔고 객지로 나갔다가 다시 이를 획보하려고 하지만 개발 바람에 밀려 좌절하는 이야기로 꾸려진다. 여기에서 사용한 ‘만취’는 술에 점령당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늦도록 푸르리라는 맥락의 ‘만취(晩翠)’다. 아들이 아버지가 늘 취해 있던 모습을 보고 ‘만취당’의 의미를 술주정뱅이의 집이라고 발설했다가 호되게 당하거니와 뒤늦게 그 만취당의 본질을 되새기고 찾으려 하지만 세상은 오래도록 청청할 의지조차 거세해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다.

‘심씨의 하루’에 등장하는 샐러리맨 남자의 하루는 서글프다. 일가붙이들이 가 있는 나라로 이민 가자고 졸라대는 아내를 달래가며 심씨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고아원 출신인 그는 이산가족찾기 열풍이 지나간 뒤 자신도 피붙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얄팍한 떡값 봉투를 받아 아내의 금목걸이까지 사들고 우여곡절 끝에 집에 당도하지만 아내는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전세금을 빼내 사라지고 없다. 이 사내는 아내 대신 술청의 여자에게 목걸이를 건네주며 운다. ‘지문’에 등장하는 맞벌이부부는 주민등록증을 신청하기 위해 모처럼 나들이 기분으로 김밥까지 싸서 출타해 아이들 앞세우고 창경원도 가려 했는데, 그만 지문이 나오지 않아 어렵게 잡은 화려한 외출이 망가지고 만다. 미장이 남편과 남의 집을 전전하며 허드렛일로 살아가는 부부의 서글픈 우화 같은 이야기다. 

‘소설판’ 총서 시리즈를 기획한 문학평론가 임우기.
세계일보 자료사진
김문수 소설의 특징은 거두절미하고 직격하는 삶의 핍진한 현장성이다. 아슬아슬한 긴장을 조성하는 구성의 잔재주를 구사하지 않는 대신 진정성으로 승부를 건다. 행간에 흐르는 풍자와 비애가 걸죽하다. 이 선집에는 이 밖에도 ‘온천 가는 길에’ ‘그 세월의 뒤’ ‘아론’ ‘종말’ ‘덧니’ ‘매’ 등 10편이 수록됐다.

임우기씨는 ‘소설판’ 총서로 지역 작가 발굴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임씨는 “웹(web)시대의 문화적 과제인, 지역과 지역 간의 연대와 소통을 위한 ‘지역적 개인으로서의 작가’들을 찾아 그 문학성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지역마다 절차탁마하는 고유의 이질적 작가 정신들을 찾아 그 문학적 내용과 가치를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하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 ‘소설판’ 시리즈로 전남 함평에 사는 김희저의 작품이 다음달 출간될 예정이다. 한국 소설 작단에 새로운 ‘판’이 열릴지 지켜볼 일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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