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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에 짓밟혀 떠난 사랑, 그래도 다시 사랑하고 싶다

입력 : 2015-05-21 19:55:59 수정 : 2015-05-21 19: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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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새 장편소설 ‘길, 저쪽’
하늘 아래 모든 사랑은 새로운 사랑이란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똑같은 사랑이 있을 턱이 없다는 게 소설가 정찬(62·사진)의 논리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사랑 이야기에 질릴 만도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작가의 말, 새삼 위로가 된다. 

정찬의 새 장편소설 ‘길, 저쪽’(창비)은 죽음조차 고마운 궁극의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사랑의 주인공은 1970년대 유신시대와 80년대의 폭압적인 정치지형을 청춘기에 통과해나온 오십대의 남녀들이다. 시인이자 치열한 운동가였던 김준일, 그는 실명으로 등장하는 시인 김지하와 더불어 민청학련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고 이후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꿈에서 깨어나 다시 미지의 세계, 죽음 너머로 스스로 사라진 인물이다. 김준일의 친구 윤성민의 회상과 그의 애인 강희우와의 헤어짐과 재회로 이 소설은 꾸려지는데, 곳곳에 포진한 깊은 사색과 도저한 관념의 레토릭이 슬픔이 배음으로 깔린 소설을 장중한 레퀴엠으로 몰고 간다.

윤성민의 투명하고 맑은 애인 희우. 그네는 성민이 감옥에 갇힌 이후 어느 날 편지 한 장 남겨놓고 사라진다. 27년 만에 그네가 다시 나타나 편지로 만날 것을 청하는데, 그네는 이미 난소암 말기 환자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그네에게는 ‘영서’라는 딸까지 있다. 성민 때문에 잡혀가 성고문을 당한 끝에 잉태한 생명이다. 프랑스로 도망가듯 건너가 한국의 모든 일을 잊고 산부인과 의사로 살던 희우는 왜 다시 옛 애인을 찾는가.

“그리운 당신! 당신을 향한 저의 그리움을 제발 비웃지 마세요. 저도 알고 있어요. 너무나 늦은 그리움임을. 쉰넷의 여자가 쉰여섯의 남자에게 품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그리움인 것도 알고 있고요. 염치가 없나요?”

그네는 희우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과 절연하고 이 땅을 떠났던 것인데 당도한 죽음이 젊은 ‘희우’를 다시 살려낸 것이다. 정찬은 희우의 몸속에는 ‘죽음이라는 낯선 생명체’가 숨쉬고 있었다고 서술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하게 한 죽음에 감사한다고 했다”는 희우에게 이런 대사를 떠맡긴다.

“죽음은 저에게 미지의 손님이에요. 전 그 손님을 잘 맞이하고 싶어요.”

이 장편은 가까운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는 유용한 자료 구실도 한다. 유신시대와 광주항쟁을 거쳐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이어지는 생생한 과거가 구체적인 자료를 동반한 ‘밤의 강물’로 흘러간다. 그 강물 위로 정찬은 “삶과 죽음 사이,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그 사이, 너무나 얇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허망한 곳”을 투명하게 응시하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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