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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서 만난 정지용의 시(詩) 공간

입력 : 2015-05-25 20:36:06 수정 : 2015-05-25 22: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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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이국서 고독에 몸부림친 가난한 유학생의 ‘향수’는 애달팠다 향수(鄕愁)는 고향을 떠나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갈수록, 고독할수록 그 감정은 더 깊어진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빼어난 ‘향수’를 뽑으라면 정지용(1902∼1950·사진)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서 외롭다고 다 그런 명편이 빚어지는 건 아니다.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우리말을 세련되게 빚어내 한국 현대시의 진경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였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천재시인이었다고 하지만 타관 땅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지용 시의 발화도 다른 양상이었거나 미미한 수준에 그쳤을지 모른다.

정지용은 1923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당시 시대 조건으로나 경제 사정으로 보아도 6년이라는 유학생활은 흔치 않은 긴 기간이었다. 지용은 휘문고보 교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서 가난한 타관살이를 했다. 충북 옥천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뛰어난 학업성적을 보였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4년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학비를 낼 형편이 못 되어 사무실 사환으로 일하기도 했던 지용은 이 학교 교주 민영휘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난 것이다. 교토에서 그가 하숙을 정한 곳은 고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유서 깊은 가모가와(鴨川)변이었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정지용 시비에 증보판 정지용전집을 헌정한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 일행. 왼쪽부터 다케다 유키, 김동희씨, 최 교수, 최세운·송민규씨.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鴨川’, 1927.6 ‘학조’ 2호)

‘수박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은 불지 않았다. 오렌지 껍질을 씹으며 홀로 앉아 향수를 저작질하는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천변에는 제비 대신 남녀 커플이 쌍쌍이 앉아 있다. 천변에 잔디까지 심어놓아 산책길로 손색이 없는 공간이다. 반대편 천변은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의 차지다. 90여년 전 조선의 산골에서 태어난 이가 현해탄을 건너와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면서 시름을 달래던 흔적은 짐작만 할 뿐이다.

10여년의 각고 끝에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보강해 정지용 전집을 발간한 뒤 이 책을 헌정하기 위해 교토의 정지용 시비를 찾아간 일행에 합류했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를 포함한 연구진 3명(송민규 김동희 최세운)과 김구슬 시인이 그 일행이다. 이들은 가모가와를 찾기 전 오전에 지용이 다녔던 도시샤대학 교정에 먼저 갔다. 도시샤대 100주년 기념관 뒤편에 자리잡은 이 시비는 2005년 정지용의 옥천 고향 사람들과 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이다. 시인의 고향에서 가져온 화강암 시비 앞면에는 ‘압천’이 한글과 일어로 함께 새겨져 있다. 시비를 찾아가던 날은 비가 내렸다. 시인의 113번째 생일을 기려 누군가 꽂아놓은 꽃들은 비를 맞아 촉촉이 젖은 채 모로 기울었다. 일행은 시비 앞에 푸른색 표지의 전집 두 권을 나란히 진설하고 시비 뒤로 돌아가 시인의 혼백과 더불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비 뒷면에는 ‘정지용 선생은 1902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140여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으며…’로 이어지는 공적을 새겼는데 최 교수 일행의 노고로 무려 137편이 늘어난 279편으로 다시 고쳐 새겨야 할 판이다.

정지용 시인이 교토 유학 시절 하숙했던 가모가와(鴨川)변에 남녀 커플들이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도시샤대 뒤편 쇼고쿠지(相國寺)로 시인의 혼백을 따라 나섰다. 문학평론가 김환태(1909∼1944)는 ‘교토의 3년’이란 수필에서 “어떤 칠흑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는 나를 상국사(相國寺) 뒤 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주었다”고 술회했다. 김환태가 그 시를 듣고 향수를 이기지 못하자 정지용이 그를 데리고 찻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쇼고쿠지는 도시샤대 바로 뒤편에 있다. 도시샤대야말로 쇼고쿠지 터에 세워졌다고 누군가 거들었다. 천장에 그려진 용이 박수를 칠 때마다 울음을 우는 쇼고쿠지 본당을 통과해 뒤편 묘지로 갔다. 어둔 그믐밤 묘석들이 유령처럼 기립해 있는 묘지에서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는 소리를 떠올리며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를 그리는 시편을 듣고 하숙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김환태를 지용이 찻집으로 데려가 ‘칼피스’를 사주며 달래야만 했던 현장이다. 일행은 향수를 더듬으며 묘석 사이를 천천히 배회했다. 먼저 간 혼백들이 묘지 주변 나무 가지들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도시샤대학에 가기 전 일행은 지용이 가톨릭 세례를 받은 가와라마치(河原町)성당에 들렀다. 이곳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는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앙 제단 뒤편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곧게 뻗은 통로를 꽃으로 장식하는 중이다. 성당 마당에서는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손에 꽂을 들고 화사하게 가족들과 웃고 있다. 지용이 세례를 받았을 당시의 성당은 이미 1967년 나고야의 ‘메이지촌’으로 해체 이전했고 지금은 새로 지은 현대식 공간이다. 지용에게 내내 큰 영향을 미쳤던 가톨릭 신앙이 공식으로 시작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깃든 곳이다. 

가모가와에서 올라와 시조(四條) 거리의 ‘카페 프랑소와즈’로 갔다. 1930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그대로 실내 장식을 유지하는 곳이니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지용은 ‘카페 프란스’를 썼을 것이다. 1920년대에서 걸어나온 양 수줍음을 심하게 타는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자를 앞에 두고 풋내나는 총각이 시종 즐거이 말을 건네는 중이다. 

교토=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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