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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의법률산책] 승강기는 부대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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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26 21:39:21 수정 : 2015-05-26 21: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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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물과 부대체물은 로마법에서부터 등장하는 법의 기초개념이다. 대체물은 수량·무게·부피로 거래되는 물건으로, 거래 관념상 개성이 없어 동종의 다른 물건으로 대체가 가능한 것이다. 금전과 곡물, 기름이 여기에 속한다. 부대체물은 그렇지 않은 물건으로 토지, 건물, 골동품이 여기에 속한다.

대체물과 부대체물의 구별이 문제 된 사건이 있다. 승강기 제조회사 갑은 건축주 을 회사에 10인승용 승강기 3대를 제작해 설치해 주고 공정률에 따라 공사대금을 지급받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갑이 마무리 공사를 제외하고 승강기 3대의 설치 공정을 모두 완료했음에도 을은 갑에게 약속한 중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갑은 수차례 중도금 지급을 독촉했으나 을이 응하지 않자, 갑은 나머지 공사를 중지한 채 승강기와 부속 자재를 남겨 두고 공사현장에서 철수했다. 그 후 건축주 을이 건축설계를 변경하는 바람에 건물에 승강기를 설치해 가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고, 현장에 남겨진 승강기와 자재는 멸실되거나 훼손돼 버렸다.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
공사대금 변제기간 7년이 지나서야 갑은 애초 약정에 따라 을의 공사대금 지급의무 및 공사에의 협력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한다고 통보하면서, 공급한 승강기의 반환이 불가능하게 됐으므로 손해배상을 구한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을의 의무가 시효로 소멸했는지가 쟁점이 됐다. 갑과 을의 계약이 도급이라면 갑의 채권은 공사에 관한 채권으로서 3년의 단기 소멸시효가 완성됐으나, 매매라면 10년의 일반소멸시효가 적용될 수 있어 아직 시효가 남았다.

대법원은 갑과 을의 계약을 도급으로 보고 갑의 채권이 시효로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결론은 옳다. 그러나 법적 추론에는 문제가 있다. 대법원은 먼저 갑과 을의 계약을 도급과 매매의 성질을 함께 가지는 제작물공급계약으로 봤다. 그리고 다수의 견해에 따라 제작·공급할 물건이 대체물인 경우 매매 규정이 적용되지만, 물건이 특정 주문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부대체물인 경우에는 물건의 공급과 함께 제작이 계약의 주목적이 돼 도급 규정이 적용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갑이 제작·설치하기로 한 승강기는 을이 신축하는 건물에 맞춰 일정한 사양으로 특정돼 있으므로, 갑과 을의 계약은 대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제작물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으로서 도급의 성질을 띤다는 것이다.

대체가 어려운 물건도 부대체물이라고 하는데 처음 듣는 정의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대체가 곤란하더라도 대체가 가능한 이상 대체물로 봐야 한다. 이 사건의 승강기도 그런 경우다. 신축하는 건물에 맞춰 일정한 사양으로 특정됐지만, 승강기 제작 회사에서 미리 준비한 일련의 사양 가운데 하나인 10인승 승객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계약이 도급인 이유는 승강기가 부대체물이어서가 아니라, 갑이 승강기 제작뿐만 아니라 ‘설치’까지 할 의무를 부담했기 때문이다. 승강기를 단순히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설치까지 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설치가 계약 내용 가운데 핵심에 해당한다는 점은 갑이 승강기를 제작한 후 설치 없이 인도만 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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