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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마지막 질문… 신에게 양심이 있을까요

입력 : 2015-05-29 00:43:20 수정 : 2015-05-29 00: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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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 선언' 필립 로스 마지막 장편 '네메시스' 국내 출간
매년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82)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언급한 장편소설 ‘네메시스’(정영목 옮김·문학동네·사진)가 국내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신의 본성은 무엇이며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지 간단치 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생의 말년에 이르러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내놓은 작품의 화두이기에 더 무게가 실린다. 누구도 쉬 답할 수 없는 오래된 질문이다. 뚜렷한 답은 없거나 천차만별일 테지만 그 질문에 이르는 과정은 이승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다.


2차세계대전이 마지막을 향해 치닫던 1944년 미국 뉴저지의 저지대 뉴어크가 무대다. 이곳은 바깥의 전쟁과는 무관한 지역이지만 적의 사령관을 알 수 없는 ‘폴리오’라는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드물게 성인도 걸리긴 하지만 주로 열여섯 살 이하의 아이들에게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아직 백신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스물세 살의 청년 버키 캔더. 강인한 체력과 또렷한 윤곽을 지닌 얼굴로 사나이다운 외모를 지닌 이 청년은 시력이 안 좋아 징병에서 면제됐다. 청년에게는 이 사실이 반갑기보다는 안타까움으로 작동했다. 체육 교사로 놀이터 감독을 맡은 그는 헌신적으로 아이들과 어울리지만 폴리오에 걸려 죽는 아이들이 생겨나자 절망한다. 애인 마샤는 청정지역인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힐’ 캠프로 오라고 애원한다. 버키는 전쟁에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놀이터에서마저 질병이 무서워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버틴다.

버티다가, 그는 애인의 간절한 청을 결국 받아들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옥 같은 고온의 저지대를 떠나 산맥의 청정한 공간에서 힘이 넘치는 아이들과 천국의 생활에 접어들지만 비겁하게 도망쳐왔다는 양심 때문에 편치는 못하다. 애인 마샤와 자작나무 뒤덮인 호수의 섬으로 카누를 저어가 별빛 아래 행복한 사랑을 나누는 그 천국에서 버키는 양심 때문에 괴로웠다. 천국까지 재앙은 따라왔다.

버키가 가까이서 다이빙을 가르쳤던 아이가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그를 무척 따르던 애인의 쌍둥이 여동생마저 위험에 처했다. 버키라는 사내의 뇌리를 천둥처럼 두드린 자각, 천국에 바이러스를 옮긴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 그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선언한 장편 ‘네메시스’는 신의 본성과 인간의 양심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문학동네 제공
그는 과연 건강한 보균자였을까. 그이도 이후 발병해 다른 감염자들처럼 죽거나 기형이 되지 않았을까. 애인과는 어찌 됐을까. 그에게 더 이상 끝까지 천국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더 이상 발설하는 건 독서를 방해하는 행위다.

버키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도둑이었다. 조부모가 그를 키웠다. 그는 이 조건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지만 폴리오 사태에 직면해서는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하느님의 본성이 달랐다면, 상황도 달랐을 것”이라고 원망한다. 선의로 가득 찬 애인의 아버지가 “양심은 귀한 것이지만 한계를 넘어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 귀한 게 아니게 된다”고 충고하자 그는 되묻는다. “하느님에게는 양심이 없나요? 하느님의 책임은 어디 있지요? 하느님은 한계를 모르시나요?”

통산 서른 권이 넘는 장편을 꾸준히 집필해오면서 인간의 운명은 물론 미국의 역사와 현실 공간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품으로 퓰리처상, 백악관에서 수여하는 국가예술훈장,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협회상, 펜/포크너상 등을 수상한 필립 로스. 그는 2012년 절필을 선언한 이후 지금까지 번복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천착하면서 신에게 기대지 않는 섬뜩할 정도로 냉정한 인간의 운명을 보여줬던 ‘에브리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작품에서는 신을 규탄하는 국면이다. 버키라는 사내는 무책임한 신 대신 사랑을 포기하는 형벌로 스스로 단죄했다. ‘네메시스’(nemesis)는 그리스신화 속 복수의 여신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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