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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한국 정치, 왜 드니로보다 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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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29 03:14:41 수정 : 2015-05-29 03: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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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참골단, 우산지목 문자가 난무하지만 개 발에 편자 격
‘막말’ 폐해 넘으려면 대오각성 필요하다
갑자기 문자가 춤춘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그제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각오로 임하겠다”고 했다. 자기 살을 주고 상대 뼈를 끊는 자세로 혁신을 추구하겠다고 한 것이다. 김상곤 혁신위원장도 고사성어를 동원했다. 우산지목(牛山之木)이다. “새정치연합은 한때는 나무가 우거졌지만 민둥산이 돼버린 중국 제나라의 우산과 같다”면서 계파 모임의 중단을 촉구했다.

고사성어, 사자성어 인용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메시지가 명확히 읽힌다. 말의 권위도 자연스레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교양 넘치는 문자를 아무리 쏟아내도 땅바닥을 기는 당의 격조를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으니 탈이다. 외려 야당 안팎의 추태 만발에 기겁하는 국민에겐 개 발에 편자 격의 과잉 수사(修辭)로 비칠 수 있다. 정청래 최고위원의 막말 파동,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과 5·18 전야제 때의 추문 기억이 생생하고 여진도 남아 있는 판국에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추도식과 전야제에 대해 새정치연합이 법적 책임을 질 일은 없다. 하지만 당내 막말 파동은 면죄부를 받을 길이 없다. 나아가 추도식 등에 대해서도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자성해야 마땅하다. 가시적 조치도 필수불가결하다. 당 차원에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털어낼 것은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당은 막말 사안만 정리했을 뿐이다. 그것도 ‘1년 당직자격 정지’라는 어정쩡한 봉합 수준으로.

정 최고위원은 시정잡배가 아니라 당 지도부의 일원이다. 그런 인사가 지난 8일 회의석상에서 동료 최고위원에게 “사퇴하지도 않으면서 할 것처럼 공갈치는 게 더 문제”라고 막말을 했다. 언행도 그렇지만 징계 결정 이후의 당 일각 반응도 가관이다. 한 친노(친노무현) 의원은 그제 “과한 징계로 의원의 말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단 한 명만 이럴까. 그간 정 최고위원을 대놓고 응원한 이들은 집단 공감대를 이루고 있기 십상이다.

비속어라고 해서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뉴욕대의 예술대인 ‘티시 스쿨’ 졸업식에서 비속어를 섞은 축사를 한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그런 이치를 말해준다. 그는 22일 졸업식에서 “졸업생 여러분, 해냈습니다. 그리고 엿 됐습니다(You’re fucked)”라고 운을 뗐다. 미 언론은 이를 두고 “올해 최고의 졸업식 축사”라고 열광한다.

새정치연합 사람들은, 특히 정청래 응원단은 드니로 화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같은 비속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전체 맥락 또한 매우 중요하다.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 대한 연구도 있어야 한다. 잡스는 말을 어찌해야 분노와 혐오가 아니라 공감과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지 본보기를 보여줬다. 이렇게 운을 떼면서였다. 

이승현 논설위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마치 제가 대학을 졸업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저는 제 인생사 이야기의 세 토막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다지 대수로울 것 없는, 그냥 인생사 세 토막입니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잡스와 드니로가 보여준 것이 천냥 빚 갚는 화법이라면 한국 정치가 지겹도록 보여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보여줄 것은 천냥 빚 지는 화법이다. 정치는 말로 살고 말로 죽는 예술이다. 잡스, 드니로보다 더 말과 어감에, 맥락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 지경인가. 야당만의 문제도 아니니 거듭 혀를 차게 된다.

한국 정치에 긴요한 문자는 육참골단이나 우산지목이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민어사신어언(敏於事而愼於言)’이다. 일은 신속히, 말은 신중히 하라는 공자 가르침이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국사(國事)를 신속히 처리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입만 벌리면 뱀이나 뱉어내는 동화 악역처럼 소름끼치는 분란을 초래하기 일쑤인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왜 잡스, 드니로의 반의 반도 닮지 못하는 것일까. 여야 공히 깊이 고민할 일이다. 유권자들이 선거에 앞서 인성검사부터 하자고 덤벼들기 전에 말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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