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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춤 잘 추는 게 꿈… 최고 일 때 내려오고 싶어요”

입력 : 2015-06-14 21:49:12 수정 : 2015-06-14 21: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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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 주역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37)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흐읍.’ 숨을 참는다. 한 다리를 높이 들어 귀 옆에 바짝 붙인 상태다. 팽팽한 긴장과 고통이 보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진다. 스트레칭 동작들이 끝나자 김지영이 벽 지지대에 허리를 숙인다.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재활·트레이닝 센터의 풍경이다.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안무가 다듬어진다면, 이곳에서는 무용을 지탱하는 몸이 만들어진다.

“오늘 한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떨 때는 스트레칭하다 목에 실핏줄이 다 터져요. 울기도 해요.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출산의 고통이 어떤지 알 것 같아요. 나이들수록 유연성이 퇴화하니 그걸 늦추려면 훈련해야죠.”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저는 일개 무용수이고 똑같은 사람인데 발레리나로 우러러보면 민망하다”며 “무용수는 무대에서 자기밖에 못 믿기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거만해지지 않도록 늘 노력한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김지영은 거의 매일같이 이곳에 들른다. 춤으로 쌓인 통증을 풀고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의 하루는 단순하다. 11시 국립발레단에 출근해 6시까지 연습한다. 저녁에는 재활·트레이닝 센터로 옮겨 9시, 10시까지 땀을 흘린다. 11일 만난 김지영은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 주인공 역할을 연습한 뒤였다. 국립발레단은 24∼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린다.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을 위한 땀은 백조의 우아함 아래 숨은 발길질을 닮았다.

김지영은 무대로는 수십 번, 연습까지 합하면 수백 번 백조와 흑조를 췄다. 2001년 국립발레단이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을 초연할 때부터 ‘백조의 호수’ 전막 주역을 맡았다. 같은 안무를 반복하다 보면 한 번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백조’를 많이 했으니 눈 감고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며 “이건 그만 연습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연습을 안 하면 또 안 된다”고 웃었다.

“저 자신이 아직 완벽한 백조·흑조가 아니라고 느껴요. 아마 죽을 때까지 완성이 안 될 거예요. 항상 공연 후 아쉬움이 남죠. 지금은 이전에 몰랐던 감정선을 많이 느껴요. ‘백조’는 동작하기 바빠서 파트너와 교감을 지나치기 쉬운데 동작 하나에도 나의 슬픔을 얘기하게 돼요. 흑조가 왕자를 유혹할 때도 나만의 대사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나한테 와’ 하다가 뒤로 돌아서서 ‘하, 얘가 걸려 들었네’ 하며 흡족해하고, ‘나를 안으렴’ 하다가 ‘흥, 됐어’ 이러는 거죠.”

그는 악마성과 섹시함을 조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흑조 오딜을 추기가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무용수들이 기술적으로는 흑조를 잘 추지만 해석이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딜도 공주이기에 귀족적이면서 숨은 악마성이 나와야 하는데, 잘못 해석하면 천박해보이거나 굉장히 남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백조의 호수’에 대해 “나를 굉장히 긴장시키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하게 되면, 일단 몸이 (허리를 꼿꼿이 펴며) 이렇게 돼요. 함부로 볼 수 없고 굉장히 저를 진지하게 만들죠. 기술적 완벽함은 물론 프리마 발레리나에게 기대하는 동작과 아우라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요.”

무대에서의 김지영은 우아한 백조 자체지만 실생활에서는 격의 없고 털털하다. 20년 가까이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으니 도도하거나 새침하리라는 선입견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내일이라도 당장 무용을 그만둘 수 있다”고 농반진반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재활센터 트레이너가 “독하다”고 표현할 만큼 성실하게 고된 연습을 소화한다. 춤을 더 잘 추고 싶어서다.

“무용을 시작하고 나서 항상 가장 큰 꿈이 춤을 잘 추는 거였어요. 내 춤을 발전시키고 싶어서 여러 훈련을 하는 거예요. 내일 당장 그만두더라도, 최고 모습일 때,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내려오고 싶어요. ‘쟤 그만 좀 해야겠다, 나이 들어서 안 되겠다’ 이런 소리 듣기 싫어요. 완벽주의자에 자존심이 드럽게 센 거죠.”

김지영을 만난 날은 그의 어머니 기일이었다. 그는 열여덟살에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공연을 보던 그의 모친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쯤이 슬럼프였어요. 10대 후반 사춘기라 무용을 하기 싫었어요. 너무나 좋아하는 발레였지만, 내가 프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죠. 슬럼프를 겪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뭐라고 많이 하셨어요. 어릴 때 그런 말이 얼마나 잔소리로 들려요. 그런데 엄마가 내 춤을 보다 돌아가신 거죠. 엄마 시신을 붙잡고 ‘발레 열심히 할게’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발레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엄마가 저한테 짐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그 일 이후로 무대를 못 버리는 것 같아요. 아마 결혼할 때쯤 되면 엄마도 놓아 주시겠죠.”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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