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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칼럼] 과거를 떠나보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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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22 23:09:47 수정 : 2015-06-23 0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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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반성 모르는 못난 일본 비난 앞서
우리 먼저 과거 잊고 용서의 손길 내밀 순 없을까
한국과 일본이 외교관계를 맺은 지 어제로 50년이다. 부산과 대마도는 50㎞ 정도 떨어져 있다. 두 나라가 국교 관계를 가진 뒤 매년 1㎞씩만 가까워졌어도 지금쯤 양국 국민이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마주하며 수교 50년을 자축하는 신명난 춤판이 서울과 도쿄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춤판은커녕 저주의 굿판이 벌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양국 정상이 각자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화해 메시지를 내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고 했고, 아베 총리는 “다음 반세기를 향해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했지만 당위만 있을 뿐 울림이 없다. 50년 전 ‘새로운 이웃’으로 사이좋게 지내기로 새끼손가락 굳게 걸어놓고도 마주보고 있을 때보다 등을 돌리고 있을 때가 더 많았던 ‘머나먼 이웃’인 탓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한·일의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 달려 있다. 두 나라가 공유한 불행했던 과거는 부정되고, 함께 나누고 있어야 할 현실은 뒤틀려져 있고, 어깨동무하고 펼쳐 갈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수교 50주년을 맞아 대척점에 서 있는 역사인식의 간극을 좁히려 뒤늦게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핵심은 건너뛰고 변죽만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이 크다. 우경화와 군사대국화에 매진하는 아베 정부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불통이고 단절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사 불감증을 꾸짖는 일본의 양심과 지성은 일본 사회의 빛이다.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대가 ‘그 정도 사과했으면 알겠습니다. 이제 됐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사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이 낸 집단성명은 “침략과 식민지배가 중국, 한국 등 아시아 이웃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다시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촉구하고 있다. 미래를 밝히는 과거와 현재의 소통이고 교류다.

김기홍 논설위원
그러나 양국의 대립과 갈등의 책임을 저쪽에게만 떠넘길 일은 아니다. 저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허물은 없는지, 저들에게 당했던 과거사를 핑계로 우리가 먼저 저들을 밀어낸 것은 아닌지 이제 돌아볼 때가 됐다. 저들이 보복·앙갚음의 대상이 아니고 화해·극복의 대상이라고 여긴다면 우리가 먼저 끌어안을 줄도 알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고 했다. 과거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민족에게도 미래는 없다. 과거사를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사를 양분 삼아 현재를 가꾸고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티베트의 노승 게셰 룬덥 소파는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기념식에서 ‘다시는 안 된다’ ‘절대로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나지막이 호소했다. “잘못된 역사를 기억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는 이해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과거를 보낸 빈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잊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현경) 노승의 고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600만명이 희생된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지며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있다.

과거를 묻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먼저 일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손길을 내민다면 그들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칠지도 모른다. 티베트 노승이 이번엔 우리 앞에 서서 다시 “과거를 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싹틔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우리 안의 상처를 보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기꺼이 떠나보낼 용기를 준비할 때가 됐다.

김기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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