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법학 |
오표시무해의 원칙은 착오와 비슷한 것 같으나 다르다. 이 원칙이 적용된 실제 사례가 있다. 갑이 123번지와 132번지 토지를 소유하는 을한테서 123번지를 매수할 의향으로 직접 을과 함께 이 토지를 둘러본 뒤 매수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러나 갑과 을은 123번지를 132번지로 잘못 알고 계약서에 매매목적물을 132번지로 적고 말았다. 123번지가 132번지보다 시세가 높다면 갑이, 반대라면 을이 자신의 의사표시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럼 계약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현행법에는 이 문제를 직접 다루는 규정이 없다. 그래서 오표시무해의 원칙이 원용된다. 계약 당사자가 합의했다면 비록 표시를 잘못했더라도 계약의 성립과 효력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갑과 을은 계약서에 잘못 표시했음에도 애초에 합의를 본 123번지를 매매한 것으로 된다. 따라서 을은 갑에게 123번지의 등기를 이전해줘야 한다. 만약 132번지의 등기를 이전해줬다면, 이 등기를 말소하고 123번지의 등기를 이전해줘야 한다.
그런데 오표시무해의 원칙은 원래 로마에서 계약이 아니라 유언의 해석에 적용됐다. 계약에는 이 원칙이 필요 없었다. 로마의 계약은 원칙적으로 당사자가 합의하면 성립했다. 합의를 ‘consensus’라고 하는데, 인식 내지 뜻(sensus)을 같이(con)한다는 말이다. 갑과 을이 비록 계약서에 132번지를 기재했지만, 123번지를 사고팔기로 뜻을 같이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당연히 123번지에 대한 매매가 성립한다. 로마의 계약에서는 이 원칙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다. 그럼 왜 현행법에서는 이처럼 복잡하게 됐을까. 계약의 청약과 승낙을 각각 의사와 표시로 분해한 뒤, 의사와 표시가 불일치하면 청약이나 승낙의 의사표시를 무효화시킬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과 을 모두 취소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분해함으로써 얻는 실익이 있으나, 법이 상당히 난해해진 측면도 있다. 로마법을 알면 현행법도 더 잘 보인다.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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