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고난을 축복으로…나를 더 깊숙이 내립니다

입력 : 2015-06-25 20:02:25 수정 : 2015-06-25 20:02:2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윤석화 1인극 ‘먼그대’
연극 ‘먼그대’는고통스러운 삶을 구원의 디딤돌로 삶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전한다. 연합뉴스
마흔 언저리 노처녀 ‘문자’는 남 보기에 궁상과 청승의 결정체다. 차림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루하다. 출판사에서는 10년째 말단사원이다. 회사에서는 부당한 일에도 불평 한 마디 없다. 이런 문자를 보며 다른 직원들은 측은해하거나 등 뒤에서 수근거린다.

사생활은 더 답이 없다. 문자가 사랑하는 이는 십년 전부터 만나온 유부남 한수다. 문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한수에게 돈과 시간, 감정을 일방적으로 바쳤다. 둘 사이에 생긴 딸마저 생후 한 달이 못 돼 그가 데려갔다. 출세한 한수가 호화롭게 살 때 문자는 궁핍에 시달렸다. 한수는 돈 한 푼 주지 않았다. 빈털터리가 되자 남자는 염치 없이 문자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문자는 빚을 내서 한수 앞에 대령했다.

연극 ‘먼그대’의 내용이다. 1983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서영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문자의 삶은 희생을 통해 구원을 갈망하는 구도자의 길로 해석돼왔다. 작가는 이를 고통의 사막에서 낙타를 키우는 것에 빗댄다. 뜻은 숭고하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삶이다. 머리로 문학적 의의를 이해하는 것과 마음 깊이 문자에게 공감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배우 윤석화는 위험 부담이 큰 이 작품을 1인극 형식으로 연극 무대로 옮겼다. 각본과 연출·연기를 모두 맡았다. 문자의 구원을 향한 갈망이 관객과 무대를 향한 배우들의 사랑과 닮았다는 생각에서 극을 풀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먼그대’는 차분하고 시적이다. 윤석화의 연기는 극을 꽉 채운다. 유일한 음악인 첼로 연주는 극적 효과를 더한다. 무대와 조명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쓰인다.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진 만듦새는 깔끔하고 세련됐다. 시작과 끝은 수화로 진행된다. 말로 전하지 못하는 행간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다. 막이 열리면 “그 수많은 억측과 편견과 천박함을 묻고 나는 고요로, 더욱더 깊숙이 나를 내립니다”라는 문자의 독백이 깔린다. 온통 검은 배경에 의자 하나만 놓여 있다. 윤석화는 문자, 한수, 이모, 직장 동료들, 집주인 등 여러 인물을 목소리를 바꿔가며 연기한다.

배우 한 명에 장면 전환도 없지만 지루하거나 평면적이지 않다. 윤석화의 에너지와 탄탄한 연기는 오롯이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1인극 형식은 고통을 딛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구도자의 삶을 전하는 데 제격이다. 극은 행복했던 사랑의 기억, 격렬한 고통을 거쳐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문자는 한수의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울지만 “(한수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더 큰 시련을 주려는 신의 등불처럼 생각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고난이 축복이 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빛에 도달하고 싶은 자유의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갈기 펄럭입니다.”

문자의 독백이 극을 닫는다. 연극은 물질에 매몰되지 않는 정신적 삶, 고통을 구원으로 승화하는 삶을 충실히 전한다. 본래 의도를 완성도 있게 구현했다. 그러나 연극을 본 뒤 이해는 가능해도 공감에는 물음표가 남았다. 준 만큼 받는 게 당연한 사회, 셈이 분명하고 물질이 중요한 시대에 몸담은 이에게는 공감에 한계가 있었다. ‘먼그대’는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가 연출 인생 60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올해로 배우 데뷔 40년인 윤석화가 연기해 의미를 더한다. 내달 5일까지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한다. 3만∼4만원. (02)334-5915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세계섹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