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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옥시토신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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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25 21:11:18 수정 : 2015-06-25 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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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시민의식, 생생히 고발한 메르스
정부 탓만 말고 시민사회도 각성해야
가수 심수봉은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다고 노래했다. 내게도 ‘그 사람’이 있다. 국내외 재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언제나 생각나는 그 사람’이다. 이름은 엔도 미키다. 일본 대지진이 미야기현의 어촌을 덮쳤던 2011년 3월11일, 읍사무소 직원 엔도는 대피를 미룬 채 무선 마이크를 잡고 경보 방송을 했다. “쓰나미(지진해일)가 예상됩니다. 즉시 고지대로 대피해 주세요. 해안 근처에는 다가가지 마세요.”

대한민국을 덮친 메르스 사태도 대형 재난이다. 가슴 뭉클한 사연이 없을 리 없다. 방역 전선에서 싸우는 의료진부터 그렇다. 다 영웅이다. 불편과 불리가 수반되는 격리 조치를 군말 없이 견뎌냈거나 지금도 견디는 시민들도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사회 고발극의 장도 되고 있다. 목불인견의 무대에 선 것은 벌거벗은 시민의식이다. 메르스 바이러스의 악기(惡氣)를 그나마 덜어줄 ‘그 사람’을 찾을 기운마저 앗아간다.

물론 메르스 사태를 키운 첫째 요인은 정부의 부실 대응이다. 하지만 정부 무능이 개탄스럽더라도 그쪽만 규탄하고 말 일인지 의문이다. 그렇게 해서 제2, 제3의 메르스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을까. 미래 대비를 위해서라도 시민의식은 괜찮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승현 논설위원
멀리 볼 것도 없다. 메르스 환자와 가족은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왕따 현상’ 때문이다. 의료진과 소방관 등도 매한가지다. 낙인찍기, 소문내기 따위가 허위 신고, 유언비어 등과 함께 횡행하는 세태는 정상이 아니다. 일부 환자, 격리자 행태도 그렇다.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니겠다”는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샀던 40대 환자는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고 언론에 하소연했다. 환자 주장을 뜯어 보면 동정 가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아 물의를 촉발한 책임은 그 자신의 몫이다.

꼴불견 행태는 다양하다. 극소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역학조사에 대한 비협조 혹은 거짓 진술로 방역 노력을 꼬이게 한 이가 즐비하다. 어떤 환자는 메르스 증상을 지닌 채로 공중목욕탕에 갔다. 대중 접촉을 일삼은 격리 대상자도 적지 않다. 해외로 공포를 확장한 이도 있다. 일일이 헤아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렇게 저급한 시민의식으로 오염된 사회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헷갈릴 정도다.

‘사랑의 호르몬’이 있다. 옥시토신이다. 인간관계만 정겹게 묶는 게 아니다. 애완견과 주인이 눈을 맞춰도 분비된다고 한다. 건강한 사회는 신뢰와 협력의 원천인 옥시토신이 마르지 않는 사회다. 옥시토신 같은 사람은 언제나 반갑다. 사회 공동체가 곤경에 처할 때는 더욱 그렇다. 2011년 3월 결혼 8개월 차 새댁이었던 ‘그 사람’ 엔도가 본보기를 보여줬다. 엔도는 당시 미리 피신한 동료들이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쓰나미에 비명을 지르던 순간에도 방송을 계속했다. “빨리빨리 피하세요. 빨리빨리 피하세요”라고. 지역주민 수천명이 방송에 힘입어 목숨을 건졌다. 엔도는 그렇게 재난 극복을 돕는 옥시토신이 됐다. 일본 사회는 당시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엔도를 ‘천사의 목소리’로 기린다.

엔도가 옥시토신 유형이라면 이번에 메르스 추태 드라마를 엮어간 ‘민폐 시민’들은 대체 어떤 유형일까. 그들도 누군가에겐 살가운 가족이고 친지일 것이다. 심수봉의 노랫말처럼 누군가에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 준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엔도와 달리 사회 공동체에 선사할 옥시토신은 턱없이 부족한 체질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메르스는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을 생생히 고발했다. 민망하고 참담하다.

메르스 바이러스는 문제다. 하지만 흉한 몰골을 드러낸 시민의식보다 더 큰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 이 불량한 시민의식은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 곁에 남아 틈만 나면 불신과 공포의 바이러스를 퍼뜨릴 개연성이 많다. 이 독소를 방치한 채로 과연 옥시토신이 샘솟는 미래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범사회적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엔도 미키가 저 하늘에서 “빨리빨리 피하세요”라고 다급하게 대피 방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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