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모딜리아니'전에 메르스 불똥? "3점 전시 불발됐죠"

입력 : 2015-06-26 16:36:09 수정 : 2015-06-26 16:36:0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메르스 때문에 이탈리아 개인소장가가 대여를 취소해 3점이 전시 불발됐다.”

지난 25일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이하 모딜리아니전) 개막식을 앞두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난 ‘전시커미셔너’ 서순주 박사(55)는 이번 전시의 비화로 ‘메르스 불똥’을 언급했다. 전시를 준비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데, 대한민국을 덮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의 피해를 모딜리아니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번 ‘모딜리아니전’은 서순주 박사가 총괄한 전시를 통틀어 가장 까다로운 전시였다. 프랑스에서 미술사와 고고학을 전공한 서 박사는 2004년 샤갈전을 시작으로 마티스, 피카소, 모네, 반 고흐, 르노아르, 로댕, 고갱까지 미술사 대가들 중 인상파 명화를 전시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명화전 12번째 주인공인 모딜리아니(1884-1920)는 겨우 35살에 결핵으로 숨진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화가로 세상에 남긴 작품이 400여점이 채 안 된다. 절반이 넘는 200점이 개인소장이라 소재 파악부터 쉽지 않았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일본 미국 호주 스위스 등 공공미술관 20여 곳과 25명의 개인 소장자들과 접촉했다.

서순주 박사는 “피카소의 경우 유화만 6천점, 모네는 2천점이다. 고흐가 남긴 작품도 900점이다. 근데 모딜리아니는 고흐의 절반도 되지 않으니 그만큼 전시를 위해 작품을 모으는 게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세계 어느 미술관을 가도 모딜리아니 작품을 3점 이상 한자리에서 보기 힘들다. 전 세계 큐레이터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전시가 바로 모딜리아니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베르메르다. 베르메르는 30점이 채 안 된다.”

‘모딜리아니전’을 기획하면서 “작품의 10분의 1만 모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 그는 “다행히 유화 40점, 드로잉 30점 등 총 70점의 진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모딜리아니는 한때 조각에 몰두했다. 하지만 남긴 작품은 28점에 불과하다.

서순주 박사는 “조각도 2점 봤는데 작품 당 보험료가 1억 원에 달해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미술품 전시를 하면 보통 보험사가 내린 작품평가액의 평균 1%정도를 보험료로 낸다. ‘모딜리아니전’의 보험평가액은 약 6000억 원. 서 박사는 “조각은 점당 무려 1000억 원이라 2점을 빌리면 2억 원의 보험료로 내야했다”며 “전체 보험료 대비 조각 비중이 너무 높은데다 조각은 유화보다 운송도 까다로워 마음을 비웠다”고 웃었다.

참고로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희소성이 더해져 매년 가격이 오르고 있다. 지금껏 최고가는 지난 2010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900만 달러(약 768억 원)에 낙찰된 '아름다운 로마여인 La Belle Romaine'(1917년작)이다.

서순주 박사는 원래 현대미술을 했다. 김포조각공원 총감독이 바로 서박사였다. 하지만 동시대미술은 동시대 사람들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시기상조인가 싶어서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명화전을 시작했다.”
지금껏 가장 히트한 전시는 반 고흐 전이다. 80만 명이 들었다. 첫 전시였던 샤갈전은 서울 부산 합쳐 70만 명, 르노아르는 60만 명이 들었다.

서순주 박사는 “고흐전은 불멸의 기록이 될 것 같다”며 지난 여정을 흐뭇하게 떠올렸다. “첫 전시를 하면서 20만 명만 들면 좋겠다고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히트를 쳤다. 덕분에 다음 전시를 할 수 있는 힘을 받았다. 좋은 전시는 되는 구나 확신이 생겼다.” 그는 2018년 세잔을 마지막으로 인상파 대가들의 명화전에 마침표를 찍을 예정이다.

- 모딜리아니에 주목한 이유는?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전시를 보고 문득 ‘왜 인물만 그렸을까?’ 의문이 들었다. 모딜리아니 작품의 99%가 인물화다. 풍경화 5점, 그 흔한 정물화도 건강악화로 요양할 때 그린 5점뿐이다.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모딜리아니는 단명의 운명을 타고난 셈인데, 짧은 생애를 예감한 탓인지 살아생전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로 갔을 때 그곳에는 피카소, 샤갈이 판치고 있었다. 현실에 좌절해 조각가로 전향하려고 했으나 건강이 안받쳐줬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대표적인 화가다. 프랑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가 정착했던 센강 우안(右岸) 몽마르트와 센강 좌안 몽파르나스는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창작과 교류의 장소였다. 당시 몽파르나스는 모딜리아니 외에도 샤갈, 피카소, 브랑쿠시, 키슬링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이들은 1925년 미술평론가 앙드레 바르노에 의해 일명 파리화파로 불렸다.

- 살아생전 명성을 얻지 못했으나 몇몇 후원자가 모딜리아니의 재능에 주목했다.

“어느 책에도 적혀있듯 모딜리아니는 나약한 삶의 유한함을 일찍 자각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예술을 통해 내면의 모습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출하면 좋을지 집착해 줄기차게 인물화만 고집했다. 미술사에 이렇게 하나의 패턴으로 일관성 있게 작품을 해온 작가는 전무하다. 미술의 역사가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20세기부터인데 모딜리아니는 전통회화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 스타일을 완성했다. 배경도 없이 단순한 그림은 내면의 정화된 형태를 반영한 것이리라.”

- 동공 없는 눈이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나 막상 이번 전시를 보니 동공 있는 눈도 많더라.

“동공 없는 눈은 다른 화가도 그렸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도 원시조각에 영향을 받아 동공이 없다. 우리나라 하회탈도 눈 부분이 뚫려있다. 모딜리아니는 처음에는 검은색으로 그리다가 나중에는 하늘빛으로 그렸다. 그에게 눈은 모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창과 같았다. 어느 날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이자 아내였던 잔느가 물었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냐?" 그때 모딜리아니가 “내가 너의 영혼을 알 때 눈동자를 그려줄게”라고 대답했단다. 무심코 던진 말이겠으나 모딜리아니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본다.”

- 전시장 입구에는 ‘행복은 우울한 얼굴의 천사다’라는 글귀를 붙여놨다.

“1907년 잠시 고향에 갔다가 친구 폴에서 쓴 엽서의 내용이다. 고향에서 파리로 갔는데 피카소가 판치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가 막막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행복 뒤에는 늘 우리가 맞이해야 할 어두움이 있다. 행복은 추구하는 거지 소유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더 좋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모딜리아니는 철학적 사고가 깊었다. 모딜리아니의 외가는 철학자 스피노자 패밀리의 후손이다. 단테를 좋아한 모딜리아니는 스피노자의 진정한 후손이길 바랐다.”

모딜리아니는 1917년 12월 3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지만 전면에 전시된 누드화가 외설적인 이유로 철거명령을 받으면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결국 약 2년 뒤인 1920년 1월 24일 결핵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내 잔느는 둘째아이를 임신한 채 남편을 따라 자살한다. 세상에 잔느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남긴 모딜리아니는 사후에야 화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독창성은 그 어떤 양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근현대미술사에 독자적으로 자리매김해 오늘날까지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전시는 10월4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계속된다. 문의 1588-2618

<뉴시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