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정치적 승리… 제왕적 스타일 굳혀 “나는 확신의 정치인이에요. 나는 ‘아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980년 영국 보수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마거릿 대처 총리가 후보연설문 작성자가 보여준 초안에서 ‘아마’라는 단어를 모두 지우면서 한 말이다.(박지향 저, ‘중간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정치권을 향해 쏟아놓은 발언록을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다듬은 것으로 보이는 그 글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치는 국민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지 자기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표현도, 어조도 확신에 찼다.
황정미 논설위원 |
최근 국내외에서 인기를 끈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원작의 탄생 배경이 대처 시대다. 원작을 쓴 마이클 돕스는 1987년 총선 당시 대처 선거 참모장이었다. 그는 작가 후기에서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대처는 화가 치밀어 폭발했고, 부당하게 잔인했다. 은유적 핸드백으로 몇 번이나 강타당한 뒤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와인 세 병을 마시고 인물과 플롯을 떠올렸다”고 썼다. 여당 상원 원내총무인 프랜시스 어카트란 인물이 총리를 제거하는 것.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이다.
요즘 여의도에서도 한 편의 정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파동은 여권의 권력투쟁 서막이다. 대통령이 강한 어조로 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배신의 정치’를 언급한 것도, 친박 세력이 똘똘 뭉쳐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를 요구하고, 버티는 유 원내대표 주변으로 비박계 의원들이 슬슬 뭉치는 것도 드라마틱하다. 내년 총선 공천권을 누가 갖느냐가 갈등의 핵심이니 어느 쪽이든 쉽게 물러설 수 없다.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김무성 대표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승부사 기질이 강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배운 사람이다. YS는 “현직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어도 못하게 할 수는 있다”는 걸 몸소 실천한 대통령이다. 자신을 ‘배신’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떨어졌고,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데다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는 박 대통령과 맞서 내년 총선, 후년 대선을 치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파동의 정치적 승자는 박 대통령이다. 이미 비박계 지도부의 기세는 꺾였다. 그래서 걱정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이 그의 정치 스타일을 요지부동으로 만들 공산이 커서다. 한 여당 중진의원은 4·29 재보선에서 새누리당 압승이 대통령에, 여당에 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정치적, 정책적 실패에도 국민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굳힐 것이란 지적이다. 그래서일까. 박 대통령은 야당은 물론 여당 지도부도 상대하지 않고 국민을 향해서만 말한다.
권력 1인자를 권모술수로 무너뜨리는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다. 대처를 추락시킨 건 2인자의 도전도, 거대한 음모도 아니었다. ‘중간은 없다’의 저자는 대처가 자신을 무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위기가 왔다고 했다. 오랜 정치적 성공이 낳은 제왕적 스타일이 근본 문제였다는 것이다. 당과 동료와 멀어진 지도자를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파동을 지켜보며 든 의문이다.
황정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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