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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의 자태, 아라한 보는 듯… 삼라만상 담겨”

입력 : 2015-07-27 20:28:41 수정 : 2015-07-27 20: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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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3003위 아라한 그린 적산 김승익 그림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20대에 들어서니 가난한 집안에서 붓을 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로 현실을 점점 옥죄었다. 유명작가도 아니니 누구도 그림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어깨너머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으니 이끌어 주는 이도 없었다. 당장 밥먹는 일에 내몰려야 할 형편에 붓은 더 이상 숟가락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을 포기하고 사는 것은 죽음과 같았다. 그림은 곧 삶의 의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삼십에 들어선 어느 여름날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눈가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헛됨을 부여잡고 사는 속세를 등지자고 결심했다. 붓을 벗삼아 절집에서 수행 길을 가는 것이 방편이라 생각했다. 해인사로 출가했다. 비가 내리는 지난 주말 일산신도시 인근에 거처하고 있는 적산 스님을 찾았다. 그는 지난해 10년에 걸쳐 해온 3003위 아라한 그림을 마무리했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그의 속명은 김승익(56). 요즘 그는 아라한 후속 작업으로 화폭에 소나무를 펼쳐내고 있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가득한 박스가 먼저 눈길을 끈다. 그냥 봐선 영락없는 물류창고다.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박스로 포위된 형국이다. 박스 안엔 아라한 그림이 가득 들어 있었다. 펼칠 공간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박스에 넣어 쌓아 놓은 것이다.

수행도량의 도반으로 삼고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적산. 그에게 소나무는 아라한같이 깨달은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왜 아라한이고 소나무일까. 궁금증은 실타래처럼 그의 지나온 삶과 버무려져 풀려 나왔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 시절에 한문서당에서 서예를 익히고, 고등학교 시절엔 묵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군단위 미술대회를 휩쓸면서 일찍부터 붓질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어린 시절 이미 글씨체와 붓 운용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를 고뇌케 했다.

출가 후 그는 그림 수행을 화두로 삼았다. 하지만 수행공동체인 절집에서 창작작업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국엔 은사 스님께 그림으로 수행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전국을 떠돌았다. 운수납자(스승을 찾아 도를 묻기 위해 돌아다니는 승려)의 길이었다. 구름처럼 물처럼 정처없이 그림의 길(道)을 찾아 나섰다.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존자를 그린 그림.
“북한산 노적사 계곡 옆 소나무 아래서 수행정진하던 중 선정에 들어 찰나의 순간에 극락세계 도솔천 길목에 이르러 아라한을 친견하게 됐습니다. 제가 본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선정에서 깨어나니 이미 제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친견한 수많은 아라한을 모두 화폭에 담기까지는 무아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제 자신과의 싸움을 반복하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아라한(나한)은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붓다의 제자들은 가르침에 따라 수행했고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이보다 높은 경지는 없다. 초기 경전은 붓다 또한 한 사람의 아라한이라 표현하고 있다. 다만 다른 아라한들과 구별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아라한 3003위를 그린 이유가 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아요. 3000이라는 숫자는 많은 수를 뜻합니다. 3은 불·법·승과 더불어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하지요.”

그에게 소나무는 수행 거처의 도반이나 다름없다. 그가 머물렀던 처처에서 그를 지켜본 것은 소나무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켜주는 소나무 그림. 부드러움과 강한 붓 터치가 어우러져 율동감을 주고 있다.
“한 곳에서 모든 악조건들을 다 받아들이며 생존해 온 소나무를 보면 깨달은 자를 보는 것 같아요. 몇 백 년된 소나무 자태에서는 깨달음의 희열까지 느껴집니다.”

작품 제목도 ‘환희송(松)’, ‘생각하는 사람’ 등 깨달음과 참선을 생각케 해준다. 결국 소나무 그림과 아라한 그림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붓질과 힘찬 붓질이 어우러져 소나무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 소나무 가지 하나는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다. 도솔천에 이를 기세다. 동양미학의 정신성이 깃들어 있다.

“서양은 지금 있는 존재 상태에 주목하지만 동양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상태에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거쳐서 장차 존재하려는 상태에 다다르려고 하는 경향 위에 그 형의 진실이 있다고 보지요.”

서양화가 경향성보다 현재의 존재형에 방점을 찍으면서 면을 중시하는 면적(面的)예술이 됐고, 동양화는 존재의 형체가 한낱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전후좌우에 연결된 관계로 구성된다고 보면서 선을 강조하는 선적(線的)예술이 됐다.

그에게서 아라한과 소나무는 다를 게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 사찰에서 학과 원숭이가 그려진 그림이 불상과 함께 나란히 위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동물로서의 실(實)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경건한 존재를 향하여 경향성을 취하는 학과 원숭이는 허(虛)다. 동양예술의 허실론이다. 존재에 대한 직접 지시가 실이라면 존재에 대한 직접 지시가 아닌 것이 허다.

“존재에 대한 직접지시는 예술 형상을 완성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허는 허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 이상의 것을 향하여 경향성을 띠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종교화라고 해도 반드시 부처를 그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그루의 소나무,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허의 경향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자연의 모습, 삼라만상을 종교가 되게 하는 기초는 다름아닌 경(敬)에 있습니다. 사찰에서 대단히 조심해서 경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는 삼라만상이 천(天)의 소산으로 여겨 절실하고도 겸손한 마음의 색을 갖는 것이 경이라 했다.

“모든 자연존재를 경의 마음으로 본다면, 예술의 형상도 또한 경의 마음에 의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요.” 그의 소나무 그림에서 부처를 본다.

글·사진=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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