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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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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04 20:33:39 수정 : 2015-09-04 20: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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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떠나가는 사람들… 가을이 닥칠 때마다 새삼스런 순리에 쓸쓸
어찌 할 수 없는 세월… 여윈 햇빛으로 들어가… 나지막이 노랠 부를까
“오늘은 유달리 거리가 쓸쓸하구나. …비인 성냥곽 같아 …송장 지나간 길 같아 …메마르고 차디차고 술 한 잔 마시면 가슴이 더 미어지는 같아 …너 작곡할 줄 아니? 그럼 샹송조로 해 봐라! 그걸 부르며 쓸쓸한 이 명동을 후줄근히 적셔 보자. 내일 가지고 올게.”

1956년 ‘주간희망’ 16호, 4월13일자에 실린 ‘세월이 가면, 명동 샹송이 되기까지’에 수록된 박인환의 대사다. 박인환(1926∼1956) 시인의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시작됐고 가을이 닥칠 무렵이면 어김없이 떠올라 취약한 가슴들을 공략한다. 이진섭이 작곡한 그 노래를 후일 박인환의 조카인 가수 박인희가 불러 삼촌의 시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이어지는, 그 노랫말이다. 박인환은 이 시를 작곡가에게 넘겨주고 서른 살 그해, 심장마비로 죽었다. 위 대사는 엊그제 박인환을 연구하는 소장학자들이 펴낸 두툼한 ‘박인환 문학전집’(소명출판)에서 챙긴 자료인데, 그들은 새로 찾아낸 박인환의 시 여덟 편도 이 책에 넣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보다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로 끝나는 ‘목마와 숙녀’로 더 알려진 시인일지 모른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로 이어지는 그 시 역시 조카 박인희가 감상적인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스럽게’(서럽게) 낭송해 많이 알려졌다.

10여년 전 시 전문 문예지 ‘시인세계’에서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서 시대의 유행과 조건에 따라 왜곡된 시인들을 감별해 보자는 흥미로운 기획을 추진한 적이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는 당시 집필한 총론에 “작자의 이름을 가린 시행을 보여주고 논평을 가해 보라고 하면 그 결과는 이른바 전문 독자들 사이에서도 참담하거나 포복절도할 성질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며 “시인 평가는 문자 그대로 작품 더하기 인물 평가가 되기 첩경인데, 일단 평가받으면 과대평가되기 쉽고 그 반대 경우도 참인 것 같다”고 썼다.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꼽힌 박인환은 “그의 시가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될 만큼 가볍고 진부하지 않다”는 변론을 들었다.

각자 눈높이에 맞는 문학의 수준과 질을 즐길 테니 함부로 예단하진 말자. 유행가의 진부함도 지겹고 유행가처럼 가슴을 적시는 한 줄도 아쉽다. 매년 다시 오는 계절이지만 구월을 맞는 소회는 서늘하다. 우리네 DNA에 삼투된, 미구에 닥칠 추위가 두려운 것이다. 이즈음 성장하는 아이들이야 모르겠지만, 예전 우리네 부모는 연탄 걱정을 시작할 시점이다. 연탄이야말로 가장이 겨울을 나기 위해 기본적으로 챙겨야 하는, 전투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연료였다. 가족을 책임지는 족장의 처지에서 서늘해지는 대기의 온도는 감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긴장되는 환경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가면, 늙을 사람들은 더 늙고 소멸할 이도 늘어나겠지만, 가을이 닥칠 때마다 새삼스러운 그 순리가 상기되는 건 쓸쓸할 따름이다. 박인환이 가고 30여년이 흐른 1988년, 최호섭이 새로 부른 노래, ‘세월이 가면’은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로 다시 대중을 적셨다. 세월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릴케의 시처럼 지금 저 ‘목발을 짚기 시작한 여윈 햇빛’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지막이 노래라도 부를 일이다. 노래는 참, 시보다 격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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