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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미술로 쓰다

입력 : 2015-09-15 21:33:01 수정 : 2015-09-15 23: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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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이는 사랑의 나라’展 여는 안규철 작가 마종기 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가 내년 2월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안규철(60) 작가의 전시 제목이 됐다. 시와 미술의 만남이다.

“조각을 전공한 사람으로 늘 시인의 상태를 동경했다. 조각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 시인을 동경한다는 것은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종이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내겐 경이로운 일이다. 조각은 왜 저런 상태가 될 수 없나 하는 의문을 가져왔다. 조각이 돌, 쇠망치, 끌로 세계속에 물리적 흔적을 새기거나 쌓아 올린다면 시는 세상을 가리키는 기호만 가지고 삶을 얘기할 수 있다. 조각은 물질과 그것의 무게와 저항을 제어하는 땀과 노동을 통해 가능하기에 흔히 작품으로 말하고 그러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래야 마땅함에도 말과 글로 노동보다 개념이 앞서는 것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각에서 물질의 무게를 덜어내고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견고하고 오래가는 재료보다 견고하고 깊이 있는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라 여기고 있다.”

관람객이 가장 그리운 것을 써 채워갈 ‘기억의 벽’.
그의 이런 선택은 한편으론 자유로운 작가로, 다른 한편으론 그를 이단자로 만들었다.

“그래왔던 저에게 이번 전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소박한 재료로 미니멀한 작업을 해 왔던 내가 가장 큰 공간에서 막대한 작품제작 지원(현대자동차)을 받아 무엇을 보여줄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했을 것이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금 이곳에 무엇이 없는지를 드러내고, 그 부재하는 것의 이름을 불러내려고 했다. 우리에게서 사라진 것, 그것들이 머무는 곳, 미래에 만나고 싶은 것들이 머무는 곳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고 이름 붙이고 그리로 가는 상상의 여정을 그려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보이는 형태와 안 보이는 생각을 대비시켰다. 관객을 매혹시키는 시각적 오브제보다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할 빈칸들을 마련해 관객을 공동창작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조형적 형태를 글과 개념으로도 대체해 미술의 조건에 질문도 던지고 있다.

안규철 작가는 미술의 경계를 넘어 문학,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 그리고 출판을 포괄해 ‘지금 여기’에 부재(不在)하는 것들의 빈자리를 드러내고,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려 한다.
“이번 전시는 나의 강렬한 기억 두 장면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지방도시 공립병원의 의사였던 아버지가 저녁시간 등잔 밑에서 빌려온 의학 서적을 삽화까지 통째로 베껴 쓰는 모습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온전히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풍경으로 내겐 각인이 됐다. 하나에 집중하는 행위의 아름다움으로 나의 작업 속에 스며들었다. 1000명의 지원자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문학작품을 차례로 필사하는 프로젝트 ‘1000명의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또 하나는 1885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이다. 당시 방송국 건물과 광장을 가득 메웠던 벽보와 아우성이다. 작품 ‘기억의 벽’은 당시 나붙었던 벽보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관람객들이 지금은 부재하지만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는가 카드에 글을 남기면 벽에 붙이는 방식이다.예를 들면 아버지, 청춘, 첫사랑 등 지금은 부재한 것들이 쓰일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문학작품을 관람객이 펜으로 써 내려가는 필사의 방.
“사람들은 ‘결국 사랑인가? 그 긴 시간들을 다 보내고 나서 이제야 유행가처럼 속되고 흔하다며 외면했던 사랑을 말하게 되었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너무 많고 싸구려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도 사랑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사랑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발길에 치이는 게 모두 사랑이고 입술에 발린 게 모두 사랑인 이곳에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런 사랑 말고 다른 사랑이 있을 거라고, 그런 사랑의 나라를 상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무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다시 해야겠다.”

그는 미술이 시장의 상품이 되고 물신이 되는 세상에서 다른 미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홉 마리 금붕어들이 9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수조에서 헤엄치고 있다. 금붕어들은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구획된 각자의 공간 속에 고립되어 있다. 무심한 아름다움 속에 절대고독이 교차하는 역설의 풍경이다. 피아노에선 슈베르트 곡이 연주된다. 전시 기간 내내 매일 피아노의 해머(건반을 누르면 피아노 선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부품) 하나씩이 빼어진다. 피아노 건반의 음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연주는 조금씩 해체되고 최종적 침묵을 향해 다가간다. 관객이 문학작품을 펜으로 써 내려가는 방은 격리된 감옥을 연상시킨다. 고립과 단절을 경험케 하는 64개의 어둠속 미로의 공간도 있다. 8m 크기의 대형 돔 설치물도 눈길을 끈다. 텅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35t에 이르는 철골시멘트가 쓰였다. 빈 공간을 위해 어마어마한 물질이 투입된 ‘역설의 미학’이다. 침묵의 방이자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우주적 공허, 아무것도 없음을 환기시켜 주는 공간이다.

“일상공간으로부터의 단절, 타인들로부터의 격리, 홀로 남은 자의 고독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다. 스님들의 묵언수행, 기도하는 사람들의 합장과 눈감기, 우리가 학교에서 보낸 그 긴 침묵의 시간들은 모두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그는 의사 시인 마종기의 시를 대학 1학년 때 접했다. 타의에 의해 미국으로 떠난 마 시인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모국어로 시를 써 왔다. 아픈 상처에도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운 시어에 그는 반했다.

“마 시인의 생각과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흠모하고 있다. 시인들은 절제되고 압축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미니멀리스트 태도를 지니고 있다. 내 작업도 그러하다. 물질의 무게를 최소화하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것이다.”

글·사진=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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