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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스칸디나비아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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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0-02 21:10:04 수정 : 2015-10-02 2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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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고집하는 ‘오베라는 남자’
시대적 성숙을 향한 현대인의 갈망
땅은 넓고 비옥하며 바다는 고요하고 풍요롭다. 산란하는 연어들이 무진장 헤엄치는 강은 맑아서 물을 자랑하고, 과일과 버섯이 지천으로 자라는 숲은 우거져 나무를 자부한다. 이 천혜의 하드웨어 위에 ‘사회민주주의’라는 협동을 가치로 하는 상생의 사회시스템을 운영체제로 마련한 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각종 소프트웨어가 구동한다.

이 나라, 스웨덴 인구는 900만명. 서울보다 조금 적다. 한반도 전체의 두 배쯤 되는 국토를 생각하면, 어디를 가도 사람 만나기 힘든 수준인 과소국이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의 문학에 전 세계가 열광 중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2004)가 돌풍을 일으킨 이후 벌써 10년을 넘겼으니 일시적 유행만은 아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우리나라에서도 ‘스웨덴 열풍’이 불고 있다. 작년에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밀리언셀러에 올랐는데, 내우(內憂)를 이기지 못한 한국문학이 맥을 못 추는 사이, 올해 역시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가 판매 선두를 달리는 중이고 이변이 없는 한 연말까지는 롱런할 조짐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아내가 죽고 직장도 잃은 후 자살을 준비하는 쉰아홉 살 남자 오베가 주인공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려고 하는 고집불통 성격 탓에 오베는 세상이 온통 고까운 사람이다. 오베가 보기에, 이 세상은 정해진 주차구역이 아니라 마을길에 멋대로 차를 세우고, 멀쩡한 물건을 고칠 줄 몰라서 신용카드로 새 물건을 들이고, 제대로 된 커피조차 내려 마실 줄 모르는 얼간이로 가득하다. 오베는 온갖 일에 심통을 부리다 지쳐 자신을 이해해 주는 아내 곁으로 떠나려고 한다. 소설은 이런 오베가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 삶의 보람을 되찾는 과정을 재미나게 보여준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 이야기에 왜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할까.

자기 원칙에 따라서만 인생을 살아가는 오베라는 캐릭터의 매력 덕분이다. 오베는 생각도 하기 전에 벌써 몸부터 움직인다. 자신의 옳음에 대한 단단한 확신을 품고 있어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과 일단 충돌하고 보는 오베의 인생은 독자가 보기에 답답할지는 몰라도 협잡이 깃들 여지도 없다. 행동으로 현실을 물리치려 한다는 점에서는 속없는 낭만이고, 정신으로 현세를 이기려 한다는 점에서는 완고한 치기이다. 하지만 오베는 우리, 독자들한테 준엄하게 묻는다. “자기 원칙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까?”

오베가 말하는 원칙은 ‘물건들은 저마다 쓰일 곳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어서 규칙과 규범을 따르면 ‘모든 길은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칙을 지키는 ‘제대로 된’ 사람들, ‘제대로 된’ 물건들, ‘제대로 된’ 사회는 오베 몰래 과거로 떠나버렸다. 그 대신 ‘물건의 알맞은, 올바른 기능을 존중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는 머저리들 세상, ‘급박한 상황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면서’ 신용카드가 주는 소비를 풍요와 행복의 척도인 양 살아가는 엉터리들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누구나 지금 세상이 문제임을 안다. 모두들 ‘제대로’ 살고 싶어한다. 이 소설의 인기는 이대로 살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이도 없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세대의 은근한 갈망을 보여준다. 원칙을 고집하고 살아도 문제없이 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싶다는. 그런데 ‘오베라는 남자’는 그 길이 원칙의 반동적 복고가 아니라 시대적 성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베가 완고한 규칙을 양보하면서 아랍 이민자, 길고양이, 게이 소년, 치매 노인 등을 포용해 새로운 원칙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상황에 따라 원칙을 진화시킬 줄 아는 힘이 전 세계가 열중하는 ‘스칸디나비아 유토피아’의 실체이면서 우리 사회가 ‘스웨덴 열풍’에서 숙고할 바일 것이다.

장은수 문학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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