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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스토리] 어느 임신부 직장인의 고달픈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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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0-09 18:26:51 수정 : 2020-10-06 13: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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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전철 내리자마자 폭풍 구토… 배려석은 ‘남의 자리’
임산부의 날(10일)을 사흘 앞둔 7일, 눈을 뜨자마자 속이 메슥메슥 울렁울렁 컨디션이 영 별로다. 자다가 두세 번씩 깨어 소변을 보러 다니느라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다. 오늘로 임신 11주 4일째. 속이 비면 입덧이 더 심해진다. 입맛은 없지만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식빵을 물 한잔과 함께 우겨 넣는다. 샤워하고 나온 신랑에게서 진한 바디샴푸 냄새가 난다. “비누로 씻으랬잖아.” 괜히 짜증을 낸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고등어구이, 꽈리고추 감자볶음, 된장찌개…. 이웃집 아침밥상이 코끝에 차려진다. 초기 임신부의 후각은 정말 놀랍다. ‘이 정도 개코라면 마약탐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황당한 생각을 잠시 해본다.

 

지하철은 이미 만원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탁한 공기 속에서 땀냄새, 샴푸냄새, 향수냄새 공격이 들어온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아침에 먹은 식빵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안 돼, 조금만 버티자.’ 환승역까지는 10분.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다. 식은땀이 흐른다. 침을 삼켜가며 한 시간 같은 10분이 가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환승역에서 문이 열리고, 화장실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 변기를 보는 순간, “우욱.” 오장육부가 몇번씩 헤쳐 모여를 반복하며 마지막 위액 한방울까지 몽땅 끄집어낸다. 폭풍구토가 끝나고 나면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기운이 빠져 회사까지 갈 길이 까마득하다. 결국 택시를 탄다.

 

회사 앞에서 남자선배와 마주쳤다. “손목에 찬 게 뭐야? 스마트워치? 만보계?” 아니, 입덧팔찌다. 사람의 손목 안쪽에는 울렁거림을 완화시키는 혈자리가 있단다. 입덧팔찌는 그 혈자리를 지속적으로 자극시켜 입덧을 줄여주는 제품이다. 입덧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3분의 2꼴로 줄었다. 이것 덕에 이나마의 생활도 할 수 있다.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주기적으로 고비가 찾아온다. 이럴 때를 대비해 선배맘들이 추천해준 각종 ‘입덧 완화 아이템’을 준비해 왔다. 속이 올라오려 할 땐 청포도맛 사탕을 먹는다. 사탕이 복중 태아에게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니 입덧이 가실 때까지만 먹자고 다짐했다. 4시쯤 배가 고파오면 집에서 가져온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마신다. 역하지 않고 포만감도 있다. 저녁은 가져온 빵과 우유로 때운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을뿐더러 식당이 밀집한 거리를 지날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야근까지 마친 뒤 퇴근길 지하철에 오른다. 앉을 자리는 없다. 바닥을 훑어보며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핑크카펫(임산부 배려석)을 찾는다. 이미 건장한 청년과 중년의 아저씨가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근처에 섰지만 내가 임신부임을 알아볼 리 없다. 앉고 싶은데 비켜 달라기는 민망하다. 갈등하던 중 건너편 좌석이 비었다. 잽싸게 달려가 앉았다. 내릴 때까지 핑크카펫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드디어 집이다. 납덩이 같은 몸으로 쇼파 위에 털썩 쓰러진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오늘 하루도 힘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불만이 밀려오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떨쳐낸다. 그러고는 아직은 홀쭉한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그래, 이게 다 네가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신호니까. 엄마는 괜찮아.”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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