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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리 하교길에 부르던 노래, 평생 업이 될 줄은…”

입력 : 2015-11-08 20:56:18 수정 : 2015-11-08 23: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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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국내 무대서는 세계적 베이스 연광철 “그냥 평범한 성악가라고 해주세요. 세계를 제패, 뭐의 영웅 이런 표현은 정말 안 써줬으면 좋겠어요.”

베이스 연광철(50)이 손을 내저었다. 헛된 포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였다. 역설적으로 연광철은 현재 ‘가장 평범하지 않은’ 한국 성악가다. 그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영국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무대에 단골로 선다. ‘바그너의 성지’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매년 구애하는 세계적 바그너 저음 가수이기도 하다. 지난해와 올여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달란트 선장, ‘발퀴레’의 훈딩 등을 불렀다.

그의 바그너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국립오페라단은 18, 20, 2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올린다. 1974년 번안 오페라로 올린 지 40년 만이다. 연광철은 유령선의 네덜란드인 선장에게 딸을 소개하는 달란트를 맡았다.

“백마 탄 왕자를 동경하는 딸을 부유한 선장에게 소개하는 아버지예요. 약혼자인 사냥꾼보다 선장이 더 윤택한 삶을 보장하리라 여겨 딸에게 선택의 기회를 줘요. 아버지의 마음인 거죠.”

바그너 오페라는 독일 작센 지방 사투리가 섞인 데다 바그너가 새로 만든 단어 때문에 전문 사전이 있을 정도로 부르기 어렵지만 연광철은 이를 정확하게 소화한다. 그는 “TV를 보면 나이에 따라 다른 말과 몸짓이 나오고 공원과 카페에서는 출신 지역별로 제각각인 말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이제원 기자
그 역시 딸 둘을 둔 아버지다. 그는 “음악하면서 유명해지거나 돈 벌려는 생각은 안 했다”며 “노래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어 감사했다”고 했다. “작은 목표만 보며 한걸음씩 왔다”는 그의 일정은 2018년까지 꽉 짜여 있다. 내년 1, 2월에는 미국 메트오페라에서 ‘일트로바토레’와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한다. 이어 3, 4월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4, 5월 오스트리아 빈국립극장에서 ‘로엔그린’, 5월 말∼7월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서 ‘아이다’ 무대에 오른다. 8월에는 미국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보스턴심포니 ‘아이다’, 9월에는 다시 메트오페라와 ‘돈조반니’를 한다. 지금은 세계 주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하지만 어린 시절 그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충북 충주시 동량면 산골에 살았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집까지 20리 길을 걸어갔어요. 날이 깜깜해졌죠. 혼자 걸으니 무서워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들은 적 없어요.”

농부인 그의 아버지는 하모니카와 퉁소를 즐겨 불었다. 그는 가계에 보탬이 되려 공고에 들어갔다. 3학년 때 취업을 위한 자격증 시험에 낙방했다. 망연자실했다. 그 순간 1년 전 학교 경연대회에서 ‘선구자’를 불러 1등한 일이 떠올랐다. 피아노학원에서 노래를 배워 몇달 만에 청주대 음대에 합격했다. 그는 “이때 노래를 배우기로 한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했다. 아버지는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댔다. 그가 ‘한 달 생활비 100달러’라는 이유로 불가리아 소피아 음대로 유학 갈 때도 아버지는 논을 팔았다. 전기는 1993년 찾아왔다. 서양인들 판인 국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도밍고는 ‘흙속의 진주’라고 그를 극찬했다. 우승 직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오디션을 봤고, 1996년 바렌보임의 추천로 바이로이트에 데뷔했다. 2002년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를 맡아 호평 받으며 급부상했다. 170㎝ 키인 그는 한계를 극복하려 키높이 구두도 신어봤지만 불편해서 관두고 음악으로 승부했다.

“독일에서 말도 못하고 괴롭고 내가 여기서 왜 이러나 생각도 했지만, 무대를 줬기에 최선을 다했어요. (말을 잘못 알아들어) 무대에서 오른쪽으로 가라는데 왼쪽으로 가고, 죽는 대목에서 뚜벅뚜벅 걸어나간 적도 있었죠.”

그의 인생은 최근의 ‘금수저 흙수저’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기 가치를 남이 보는 잣대로 정하는 자체가 잘못 됐다”며 “자기 스스로를 존경하면서 살라”고 했다.

“유럽에 살면서 ‘내가 왜 한국음악을 안 했나, 한국에서 살 수도 있는데 왜 서양 사람 속에서 그들의 음악을 하나’ 싶고 물속의 기름 같았어요. 키 큰 백인·금발과 비교하면 전 당연히 흙수저였지만 저는 제게 만족하는 게 있었어요.”

연광철은 강하면서 동시에 감미로운 저음, 깊은 작품 해석, 정확한 가사 전달로 정평이 나 있다. 목 관리는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사는 편이다. 기자에게 “자판을 친다고 손 관리를 따로 하느냐”고 반문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70살까지는 건강이 허락하면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종종 ‘아버지 과수원에서 농사지으며 해외 무대를 오갔으면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꽃피고 열매 맺고 겨울이 오는 과정을 함께하며 사는 게 좋다”고 여긴다. 자연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그는 “녹음이나 명반에 대한 욕심은 없다”며 “죽으면 잊혀지는 게 좋다”고 했다. 종종 고향 어르신 앞에서 노래하는 그는 올 12월에도 충주문화회관에서 독창회를 연다. 대학 은사가 있는 양로원에서도 노래할 예정이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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