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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타고난 천재… 어느 순간에 어떤 글씨체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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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1-30 20:13:27 수정 : 2015-11-30 23: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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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추사 평전 쓰는 간송미술관 민족미술硏 최완수 소장
삼라만상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시각인 새벽 3시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50년 가까이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지켜오고 있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74) 소장의 하루 시작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욕재계다. 예전 같으면 성북동 인근 목욕탕에 갔지만 요즘엔 모두 사라져 삼선교까지 발걸음을 한다. 오는 길에 걷는 것으로 운동을 삼고 있다. 사실상 간송미술관의 문간방이라 할 수 있는 공간에서 숙식하며 지내는 그의 모습은 수행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선방의 스님 같은 생활이다. 세상의 영화(榮華)와는 거리를 둔 삶이라 할 수 있다.


“요새 추사 김정희한테 붙잡혀 매여 있지. 체력이 달려 예전처럼 하루 종일은 못해. 추사평전을 쓸 준비는 다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손 볼 곳이 많아.”

그는 추사라는 인물이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인물이기에 자료가 넘쳐 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료를 넣고 빼는 선별작업도 쉽지 않다. 게다가 간송 소장 이외의 작품까지 망라해 기존자료에서 번역이 잘못되거나 미진한 부분을 수정보완까지 해야 한다. 먼저 기초자료에 해당하는 서화집을 먼저 내고 이를 바탕으로 평전 작업에 들어갈 작정이다.

서울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소장은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구체적 대상을 불상에서 찾으면서 미술 쪽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는 대학시절 고고미술을 부전공으로 선택하면서 간송미술관과 인연을 맺게 된다. 중국의 아류로 취급됐던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 작업이란 게 끝도 없어. 많이들 해놨지만 기준작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고 있지.”

그는 젊은 시절엔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 많았지 절대적으로 양이 적었음을 안다. 조선에 대한 식견도 부족했다. 추사 당시 역사적 사실도 상당히 보충했다.

“진경문화 절정기의 인물인 겸재 정선을 연구할 땐 재미가 있었어. 하지만 추사 연구는 망국으로 가는 시대라 재미가 덜해. 시대상이 어두웠으니깐.”

척족들의 세도와 그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추사도 그 일원일 수밖에 없었다. 귀양살이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도를 지키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다 가졌을 때의 한계’가 있었다.

“추사는 타고난 천재였어. 잘난 이가 좋은 집안에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시기질투의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 게다가 타협을 모르니 오만으로 비쳐지고 배척과 질시를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지. 나쁘게 표현하면 독불장군이야.”

추사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져 중국의 역대 서화와 학문, 시에 능했다. 시서화, 금석학, 고증학, 성리학 등에서 누구한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생각이 뚜렷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를 청나라 고증학의 아류로 보기 쉬운 이유다.

“아류의 한계를 생각해 봐야 돼. 공부라는 것도 그렇게 따지면 남이 한 것을 배우니 아류라 할 수 있지. 그냥 알고 있는 수준에서 그치면 그게 아류야. 그러나 소화시켜 자기화하면 창신(創新)이라 할 수 있지. 추사가 늘 내거는 것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추사는 정의구현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했다. 자연스럽게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에 있었던 순헌왕후의 눈밖에 나게 된다.

“자신이 제일이어야 하는 순헌왕후에게 추사의 행동은 오만한 모습으로 눈엣가시로 비쳐졌지. 추사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야.”

추사는 제주유배에서 금방 풀려나리라 생각했지만 9년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절망, 체념, 달관의 세월이 추사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추사는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킨 동갑내기 초의 선사와도 교류했다. 초의에게 써준 글씨 ‘명선(茗禪)’이 유명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30대 때에는 승려들이 도성출입을 못하던 시절이었다. 주로 도성밖 별장이나 암자에서 만났다. 청나라에서 북학(고증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선비들은 승려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청나라에서 선비들이 승려들과 거리낌 없이 만나는 모습들을 보고 조선 사회도 변하기 시작한 거야. 추사는 주로 도성밖 별장에서 초의와 만났지. 서로 불교 얘기도 나눌 정도로 수준이 맞아 의기상통했지. 차를 좋아하는 것도 닮았어.”

차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추사는 그 내용들을 초의에게 알려줘 차를 만들게도 했다. 일종의 새로운 차 정보 제공이라 할 수 있다. 말귀를 서로 알아들으니 초의는 추사의 별장에서 한겨울을 나기도 했다. 추사가 부인상을 당했을 땐 초의가 제주 유배지까지 찾아가 위로했을 정도다.

최근 들어 한국미술, 한국문화의 좌표 설정 논의가 활발하다. 조선시대 우리 문화의 좌표를 설정했던 겸재와 추사에 대한 관심도 깊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최 소장이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대의 문화좌표 설정을 위해 그동안 겸재와 추사를 연구한 거야.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나 정확히 알아야 해. 관점에선 자유롭더라도 사실에 충실해야지. 주변 열강 속에 독립성을 유지하며 살아 온 것은 우리 선조들의 현명함 덕분이야.”

그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문화도 종착역으로서 한반도에 모두 다 실려와 부려졌다고 진단한다.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온 것을 탁월하게 요점정리를 잘 한 것이 우리 조상들이란 얘기다.

“본질 파악을 통해 우리 전통과 세계 문화 흐름을 융합시켜 종결처리했다고 할 수 있어. 인도와 중국을 거친 반가사유상도 그랬고, 인도와 중국의 석굴미술도 석굴암에서 종결처리됐지. 석굴암 속에 세계성이 다 들어 있는데 아류라고 할 수 있나. 닮았는데 최종적으로 안 닮았는데 어찌할 거야.”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해법도 겸재와 추사에 다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서양화도 우리 그림으로 성공적으로 소화해 내리라 확신하고 있다. 다만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성급해서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겸재는 중국의 남·북종화 화법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우리 고유문화도 확실히 이해한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이다. 추사도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융합시켰다.”

그는 요즘 작가들이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익히지 않고 억지로 과시만 하려니 진전이 없다고 지적한다.

“사회가 더 안정되고 발전되면 감상안들의 요구가 달라지게 된다. 더 아름답고, 더 고유하고, 자존심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을 탐하게 마련이다. 겸재와 추사의 작품이 당대에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요즘 추사의 글씨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모든 서체를 섭렵하고 우리 고유의 서체까지 완벽하게 이해했던 추사의 모습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30대 때에 썼던 구양순체를 60대 때에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어. 추사 연구자들이 글씨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헷갈리게 할 정도지. 그만큼 추사가 모든 서체에 대해 늘 연구하고 구사할 수 있게 단련하고 있었다는 얘기지. 작심하면 어느 순간에 어떤 글씨체도 가능했다는 거야. 추사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이를 바탕으로 추사체를 완성하게 되는 거지.”

인터뷰를 마친 그가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등 뒤로 추사평전의 얼개가 보이는 듯했다.

글·사진=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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