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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2인자 장성택… 왜 처참한 운명 맞았나

입력 : 2016-02-05 19:48:30 수정 : 2016-02-05 19: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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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지식인이자 실용 개혁파
2인자 극복 못한 아둔한 인물
북한 권력 중심에서 펼쳐졌던
장성택 파란만장한 행적 그려
라종일 지음/알마/1만6000원
장성택의 길/라종일 지음/알마/1만6000원


북한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고모부 장성택은 명실상부 2인자였다.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김패밀리 체제에 의문을 가졌던 진보 지식인이었다. 인민과 당원, 군인들의 굶주림을 보고 이를 개선하려 노력했던 실용 개혁파였다. 하지만 그는 2인자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 아둔한 사람이었다. 김정은이 기반을 닦은 직후 숙청 1호로 지목돼 한순간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까.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차장, 국가안보보좌관, 주일·주영대사를 지낸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가 장의 굴곡진 인생을 책으로 엮어냈다. 절대 왕정 시대보다 더 답답한 유일 체제의 내밀한 권력게임을 파헤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라 교수는 대북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정부 요직을 지낸 터라 가능한 한 사실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장성택이 2002년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남한에 왔을 때의 토막 얘기다. 망명 탈북인사 황장엽은 측근 인사를 급히 찾아, 밀봉된 봉투 두 개를 건네면서 비밀스러운 당부를 했다.

저자 라종일 교수는 장성택이 처참한 최후를 맞기까지 북한의 개혁을 위해 고민했던 인물이라고 전한다.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 때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과 함께 운구차를 호위하는 장성택(왼쪽)과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에 끌려나가는 장성택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첫번째 봉투에선 “장성택이 서울 시내를 방문할 때 봉투에 들어 있는 쪽지를 몰래 전해주라”는 지시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두 번째 봉투의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장성택, 지금도 늦지 않았다. 조국의 반역자가 되겠는가? 아니라면 남한에 남아라!” 황은 북에 있을 때 신임했던 제자이자 개혁 동지였던 장에게 망명을 권유했던 것이다.

장성택은 김정일과 후계자를 논의했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장성택은 평소 김정일이 마음을 두고 있는 쪽을 알고 있었다. 장 자신도 해외에서 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정남이나 유약한 정철보다 정은이 낫다고 생각했다. 장은 어린 정은을 보좌하면서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김정일이 묻자 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막내 아드님이 어떻겠습니까?” 김정일은 즉각 반응은 없었지만 안면에 안도와 만족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한참 만에 김정일이 말했다. “그래, 막내를 세웁시다. 내가 공개하라고 할 때까지 비밀로 하세요.”

그 후부터 김정일은 군부대나 당 중앙위원회 행사에 김정은을 동반했다.

북한 인사들은 장에 대해 능력과 포용력, 지도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증언했다. 이른바 ‘기쁨조’를 운영할 때도 구성원인 젊은 처자들이나 참가자인 권부 핵심 인물들을 세심하게 챙겼다. 사실 기쁨조 때문에 부인 김경희하고 사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김정일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는 일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장은 당 정치국과 비서국에 개혁적인 인사들을 포진시켰다. 개혁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제3경제, 즉 외화벌이 사업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구 세력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고 김정은의 심경을 건드렸다.

한번은 호텔 객실까지 만취한 장을 데려간 북한 외교관은 기겁했다. 장이 느닷없이 일어나 반동적인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동무, 큰일났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국은 지금 말이 아니네.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네. 조국에서 굶어 죽어가는 당원들, 간부들, 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아니 오네. 술이라도 마셔야지.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위에서 한번만 결심하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장성택의 최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2년 12월 13일 4신기관총이 그의 몸을 찢었다. 남은 시신은 화염방사기로 불태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 며칠 후 김정은은 고모 김경희의 집을 찾았다. 형식적일망정 곁가지가 아닌 친고모에게 그간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김경희는 김정은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의자 밑에서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고 한다. 질겁한 김정은은 몸을 피했고, 측근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았다. 김경희는 저항하지 않았다. 장성택 숙청의 내막은 아직도 비밀에 싸여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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