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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풍 개척한 겸재… 조선의 산천 화폭에 담다

입력 : 2016-02-12 19:40:18 수정 : 2016-02-12 19: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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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지음/북촌/2만2000원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이석우 지음/북촌/2만2000원


진경산수라는 독특한 화풍 덕분에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작품은 대부분 알아본다. 겸재가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데에는 그만큼 예술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별한 화풍은 어디서 온 것인가.

당시 사대부 가문은 매란국죽을 소재로 한 수묵화를 주로 그렸으나, 겸재는 그러지 않았다. 겸재는 청의 문물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천문학 겸교수로 있었다. 첨단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관직이었다. 그는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화법을 조선 전통 화법에 적용함으로써 진경산수화라는 독특한 세계를 개척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겸재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가’로 지칭한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사회에서 서양화법의 영향을 우리 식으로 재창출한 감각은 가히 선구적이라 할 만하다. 

겸재 정선이 살던 동네 뒷산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로, 진경산수라는 새 화풍을 개척한 겸재의 대표작이다.
연합뉴스
사대부 출신 화원(대부분 중인 출신)인 겸재는 숙종 대부터 영조 대까지 관상감의 천문학 겸교수를 지냈다. 이어 의금부도사를 거쳐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한강의 수려한 경관을 화폭에 담았다.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와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가 대표적이다. 영조가 겸재에게 양천현령과 청하현감을 맡긴 것은 조선의 비경을 그려 간직하도록 하려는 안배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화가로서 최고 수준에 오른 것이다.

‘독서여가‘ ‘인곡유거’ ‘경복궁’ 등에서는 올곧은 선비의 삶과 역사인식이 드러난다. 겸재의 산수화는 저절로 품위가 우러난다. 높다란 산이나 그윽한 들녘, 유유히 흐르는 강이나 기괴한 바위들을 등장시켜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경복궁’에는 산도, 강도, 신선의 도원도 없다. 우거진 소나무 숲, 폐허 속에 남은 주춧돌 몇 개, 불타버린 영루와 허물어진 돌담을 그려낸다. 조선 건국의 상징인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됐다. 그로부터 160여 년이 지난 1754년 겸재는 허물어진 경복궁을 그렸다. 역사는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고여 있다. 찾아가 말을 걸면 되살아난다. 겸재가 화폭에 담은 경복궁은 아픈 역사를 기억해낸다.

저자는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모두 겸재의 가지에서 뻗어 나왔거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풀이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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