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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실학자 정동유의 큰울림 주는 비판 정신

입력 : 2016-02-12 19:22:47 수정 : 2016-02-12 19: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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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유 지음/안대회, 서한석, 김경희, 김보성, 이승용, 임영걸, 임영길 옮김/휴머니스트/3만원
주영편 - 종횡무진 지식인 정동유 - 심심풀이로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을 만들다/정동유 지음/안대회, 서한석, 김경희, 김보성, 이승용, 임영걸, 임영길 옮김/휴머니스트/3만원


저자 정동유(鄭東愈· 1744~1808)는 정조 시대의 실학자이다. 1777년 34세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늦은 나이에 과거를 치를 자격을 얻은 셈이다. 이후 대과에 응하지 않고 집안의 명망에 기대어 음관이 되었으나 고위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정광필 이래 정유길, 정창연, 정태화로 이어지는 4대 정승을 배출한 회동정(鄭)씨 집안 출신이다. 주영편은 자신의 지식을 쏟아부은 일종의 잡학 문집이지만, 근대기로 넘어가는 조선 지성사에 족적을 남긴 명저로 꼽힌다.

진보 성향의 양명학에 심취한 정동유는 당시 사대부의 주류 담론인 성리학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학술적 논리보다는 현상이나 사실에 집중했다. 선배 학자에 배치되는 ‘배치선유’(背馳先儒)의 태도라며 이런 비판적 시각을 용납하지 않는 학자들의 권위적인 행태를 극도로 혐오했다. 이를테면 공자 맹자 주자 등 당시 지식의 원천이자 판단의 근거였던 선험적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런 대목도 있다. “주자가 ‘주자어류’ 권79에서 말하기를, 천하에 강 3개가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강이라했다. 압록강은 한반도와 중국 땅을 경계짓는 강이거늘, 장강 이북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가 어찌 압록강을 알겠는가. 장강 이북 산천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지도와 전기록으로 얻은 지식에 불과하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성리학의 시조인 주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학문에서는 이단아 같은 행동이다.

정동유는 특히 노비제도를 없애지 못한 고려, 조선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노비제도가 양반 자신들만 이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형성, 유지되었다. 또한 붕당 때문에 인간의 도리가 무너지고 국가가 망해간다”고 한탄했다. 이 같은 진보 지식인의 면모는 자신의 성벽을 쌓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대단히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저자는 또한 일본 유학자 겐 마사유키(源正之)와 이토 진사이(伊藤仁齋)를 매우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에 유학이 없다고 폄하하는 조선 학술계의 폐쇄성을 지적한 대목이다. 정동유의 실학적 사고방식은 조선후기 실학적 연구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된다.

‘주영편’은 정동유가 사망한 뒤로도 100여 년 동안 필사되어 읽히다 1931년 역사학자 정인보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정인보는 1931년 1월 신문에 “조선의 문학과 지리, 역사에 대해 홀로 터득한 혜안을 찾아볼 수 있는 대저술”이라고 평했다.

정인보는 양명학에 기반을 둔 실용적 시각으로 성리학을 해석했다.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의 정신과 민생을 살리는 사회 제도 등에 천착했다. 주영편의 번역이나 소개는 한국이 아닌 일본 도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일본 유학자 시미즈 겐키치(淸水鍵吉)는 1923년에 ‘선만총서(鮮滿叢書)’ 제8권으로 숙향전과 함께 주영편의 일부를 번역해 간행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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