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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은 강인한 생명력… 백두산 그리며 건강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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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07 21:24:31 수정 : 2016-04-07 2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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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한국 채색화 맥 잇는 화가 이숙자 작업실이 텅 비었다. 7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회고전을 위해 작품뿐 아니라 채색도구와 채색재료들이 미술관으로 몽땅 옮겨졌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빈 공간을 채워보았다. 큰 진열장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국채색화의 전통을 잇기 위한 노력은 작업실 진열장을 채색재료로 가득 채웠다. 마치 실험실의 시료 진열장 같은 분위기였다. 한국 채색화 계보를 잇고 있는 이숙자(74) 작가를 오랜만에 일산 작업실서 다시 마주했다. 왜색으로 폄하됐던 채색화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삼국시대 고분벽화, 고려시대 불화를 위시해 조선시대 채색화에 이르기까지 북화 전통의 채색화는 질적 양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조선후기에 들어온 중국화론에 기준하여 평가되면서 비정통화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조선후기 회화사에 북화 전통의 채색화가 외면당하면서 해방 후 채색화를 일제 유산으로 오해하게 됐지요.”

사실 중국 명대 말기 동기창의 화론인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이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때부터 사대부 문인화만이 숭상됐다. 채색화는 민화나 무속화, 궁중회화와 인물화 등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는 보리밭 풍경으로 한국 채색화의 본령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보리밭이었을까.

“30대 때 우연히 보리밭 풍경을 바라보게 됐어요. 왠지 즐겁고 행복한 게 아니라 울고 싶어지더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울고 싶어질까 생각해 봤지요. 너무 아름다우면 눈물이 나는 법인가봐요.”

그는 화가로서 당연히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보리밭 화가로의 첫 출발이었다. 그동안 인물화와 오방색 민예품을 그리던 그에게는 새로운 전기였다.

“민예품들은 서너 달 열심히 하면 완성이 돼서 더 이상 그릴 수가 없어요. 욕심을 내서 손을 대면 작품에 과부하가 걸리지요. 그런데 보리밭은 내 노력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면서 보리밭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됐지요.”

원도 한도 없이 실컷 그림을 그려왔고, 그 시간들이 참으로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숙자 작가. 그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채색화의 미의식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미술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양반들이 여기로 그린 수묵화보다는 전문적으로 전력을 투구했던 채색화가 오히려 한국화의 주류라고 말한다.

“천한 신분의 직업 화가들이 그린 북화는 격이 낮고 문인사대부들이 그린 남화는 격이 높은 예술이라고 여기는 것은 봉건시대의 화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일본 전통회화가 서양화에 눌리자 북화 계통의 채색화를 장려하면서 신일본화풍을 정착시켰다. 작가들의 자각이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이라는 틀 속에 한국화를 가둬서는 안 됩니다. 요즘 서구에서도 한국의 화려한 채색화 전통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채색화 전통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에서 이당 김은호로 이어졌다.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안동숙 등이 이당의 제자들이다.

“한국 전통채색화를 전수받은 이당은 조선말기 어진과 벽화도 그렸어요. 실력이 있으니깐 북화풍의 일본화가 막 들어올 때 자연스럽게 각광을 받게 되지요. 이당이 없었다면 한국채색화의 계보가 무너졌을 거예요.”

이당은 일제때 화단에서 파워풀하게 활동을 했다. 친일시비가 있지만 김기창 등을 배출하면서 한국채색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냈다. 이당이 없었다면 자칫 한국채색화의 전통을 얘기할 건더기마저 없게 됐을 것이다.

“저는 김기창 선생으로부터 한국채색화의 전통을 사사했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천경자 선생과 박생광 선생님에게도 배웠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이브의 보리밭’. 작가는 이 작품을 만개한 봄꽃을 보듯 감상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보수적인 시대에 과감한 여성누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나중엔 보리밭과 융합시켰다.

“데생 공부엔 여성누드만큼 좋은 것이 없어요. 학창시절엔 크로키 동아리를 만들어 누구보다도 열심히 스케치 공부를 했어요. 동아리 회원이 한꺼번에 옷을 벗고 누드스케치를 한 일화도 남겼지요.”

그의 그림 속엔 소도 한때 등장했다. 보리밭을 스케치하다 소도 보게 된 것이다.

“소 눈을 들여다보면 맑고 커요. 깊고 뭔가 영적인 교류 같은 것들이 느껴져요. 끈기와 유사시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모습은 우리 민족성을 닮았지요.”

그는 소의 등선에서 여체 못지않은 회화성을 발견했다. 보리와 소도 융합을 했다. 6m, 9m, 10m 크기의 대작들을 4년에 걸쳐 완성했다. 일부러 대작들에 매달렸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쇄도했어요. 심지어 잡지사에서 글까지 써달라는 요청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이래서는 작업을 못하겠다 싶어서 나를 나무에다 꽁꽁 붙들어 매듯이 작품에다 꽁꽁 붙들어 맸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대작을 하다 보니 다른 것들은 다 포기하게 되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작가들에겐 작업에 대한 강박관념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그도 예외가 아니다. 보리와 여인, 소가 그의 화폭을 장식해 나가면서 세월도 흘렀다.

“결국엔 생명력을 그려온 발자취였습니다. 동토를 견디고 싹을 내미는 보리 같은 강인함과 모든 것을 품는 모성, 소 같은 끈기야말로 생명력의 상징이지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의 건강까지 회복시켜 줬다는 작품 ‘백두성산’.
그는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한국성(韓國性)의 기표라고 했다.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도 한국성이라는 화폭에 초대했다. 작품 ‘백두성산’(白頭聖山)이 압권이다. 9m가 넘는 대작으로 2000년에 시작했지만 중지했다가 2014년에 다시 시작해 올 들어 어렵게 마무리를 했다. 해와 달이 있는 현대판 일월성신도라 할 수 있다.

그는 백두산에 올라 스케치도 했다. 귀국해 펼쳐보니 스케치에서 에너지가 느껴졌다.

요즘 그가 흔히 듣는 얘기가 하나 있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현대미술이 강하다는 얘기다.

“그건 창피한 소리예요. 일본은 일본화가, 중국은 중국화가 강하다는 말이지요. 한국엔 한국미술이 없다는 말인 거지요.”

그렇다면 한·중·일 채색화는 어떻게 다를까.

“한국은 맑아 보이고, 일본의 색채는 장식적이고, 중국은 같은 청색이라도 무거운 느낌이 있어요.”

끝으로 그에게 채색화 스승에 대한 인물평을 해 달라고 했다.

“김기창 선생님은 인간적인 포용력이 으뜸이고요, 천경자 선생님은 다혈질적이고 프라이드가 강한 분입니다. 박생광 선생님은 남자답지 않게 예민한 천재성을 지닌 분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채색화 작가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채색화가 한국미술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붓질 50년’의 신념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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