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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을 신념… 인간의 모호한 이면 들추다

입력 : 2016-04-28 20:10:00 수정 : 2016-04-28 2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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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9년 만에 첫 멜로 소설
‘새벽별이 이마에…’ 쓴 구효서
구효서(59)씨가 등단 29년 만에 처음 쓴 ‘멜로’라고 밝힌 통산 20번째 장편소설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해냄)를 펴냈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얽힌 사랑 이야기다. 교통사고와 기억상실로 이어지고 두 여자가 한 남자를 같이 사랑하는 통속 멜로의 전형적인 삼각관계다. 이른바 본격문학 작가로 국내의 굵직한 문학상을 대부분 휩쓴 베테랑 작가가 상정한 멜로는 기실 끝부분에 이르면 ‘도구적 전략’임이 드러난다.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과연 신념의 주체는 진정 ‘나’인 것인지 모호한 이면을 드러내면서 독자들을 몽환에서 깨워 사유로 이끌어낸다.

오래전부터 멜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이번에 원을 풀었다는 소설가 구효서. 그는 “이 소설은 느림의 형식이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면서 “따뜻하고 안타깝고 서늘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조용히 진행되길 바랐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어릴 때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 ‘수’, 어릴 때부터 수와 애환을 나눈 ‘엘린’. 이들은 자매처럼 성장했는데 수가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실종되자 엘린은 수를 찾으러 아프리카로 온다. 수는 아프리카에서 테러조직의 습격을 받아 몰던 차가 전소됐다.

간신히 한국 의료봉사단원들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후송돼 얼굴을 포함한 전신 성형수술을 받은 끝에 건강을 회복하지만 그네의 기억은 과거를 모두 잃어버린 두 살짜리에 머물러 있다. 그 수와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가 ‘리’다. ‘리’는 수에게 프러포즈를 한 뒤 그 답변을 듣기로 했는데 수가 출장을 갔다가 변을 당하는 바람에 자신이 차였다고 생각하며 쓸쓸해하다가 엘린을 만나 다시 깊고 뜨거운 사랑을 하는 중이다. 

엘린과 리가 ‘수’라는 존재를 모르거나 잊은 채 서로 사랑하는 틈바구니에 수가 한국에서 돌아와 관계에 틈입한다. 겉으로 평화로운 삼각형이 완성돼 환하게 흘러가지만 결국 리와 수가 뜨겁게 사랑하던 사이라는 걸 세 사람은 각자 알게 된다. 다만 서로 모르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착각해야만 그들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는 게 사실이다. 이들은 이 평화를 잘 유지하기 위해 ‘이페’에 가기로 한다. 그곳에는 ‘은라의 눈’이라는 두 개의 크고 깊은 돌 구덩이가 있는데, 아무나 쉽게 못 가지만 그곳에 들어가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대서 품은 소망이다. 정작 이곳을 다녀온 뒤 세 사람 사이에는 파국이 찾아온다.

‘엘린은 소중한 모든 것을 지키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전의 어떤 때와도 달리 절실했다.

소중한 모든 것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리와 자신, 그리고 수가 이룬 삼각형의 평화가 영원하기를. 세 꼭짓점을 잇는 선분이 악기의 현처럼 곧고 빛나기를. 세 개의 현이 동시에 울릴 때 그 소리가 보랏빛 하늘의 새벽별처럼 영롱하기를. 삼각형의 내면은 언제나 배려와 사랑의 공명으로 가득하기를. 그러기를.’

‘리’ 또한 그들 사이의 현상유지를 바랐다.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그 기도의 성소에서 그들의 관계에 대한 침묵이 지켜지기를 기도했다. 정작 그곳에 다녀온 뒤로 “소망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심이라는 것이 갑자기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게 되었어”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오히려 망가져 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구효서는 “기도라는 건 내면의 진실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행위인데 사실은 하늘의 의지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이라며 “하늘은 나를 정확히 알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내 기도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 사람이 간절히 기도를 한 연후 평화가 깨진 배경을 설명하기는 힘들 터이다.

기도의 성소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정작 ‘은라의 눈’을 목전에 두고 자신은 빠진다. 그곳의 기도 효험이 그리 영험한 것이라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남으라고 해도 기어이 따라가야 마땅한데 썰렁할뿐더러 자신도 그곳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 가이드는 “그곳에 가면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숨겨진 욕망이야말로 하늘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기에 그 욕망의 완성이 불러올 파국이 두려운 것인가.

구효서는 “긴장이 고조되면서 갈등이 격정적으로 전개될수록 통상 소설의 페이스가 빨라지게 마련인데 페이스가 느리면서도 그런 긴장이나 갈등을 드러낼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면서 “이번 소설은 끝까지 아다지오 풍으로 가면서 그 안에서 긴장을 느끼게 만들어 빠른 페이스의 긴장과는 다른 맛일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사소해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큰 실험인데 아주 작은 차이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작가들 아니냐”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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