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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의 서재다. 1881년 창덕궁 별당으로 세워졌다가 1891년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안의 현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고종은 정조 치세를 왕정의 모범으로 삼았기에 정조 개혁정치의 구심점이던 규장각의 비중을 높이고 규장각 도서 정리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집옥재는 규장각의 뒤를 잇는 역사성을 지닌 곳이다.

집옥재는 양쪽 벽을 벽돌로 쌓아올렸고 밖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내부는 2층 구조인데 넓은 홀로 개방돼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현판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길게 세워져 있다. 언뜻 보기에 중국풍의 화려한 건물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고종 당시의 입장에서 말하면 시류에 맞추어 지은 신식 건물”이라고 했다.

고종은 시대 변화를 읽으려 했다. 중국에 대한 조공책봉 관계로 나라를 유지했던 조선이 자주국가로 변모해야 했고 그러려면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돼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진문물 수입창구였던 중국에서 서양의 제도·문물을 소개하는 책들을 포함한 중국 신서적 4만여권을 구입해 집옥재에 두고 국제정세를 파악하거나 정책을 수립할 때 자료로 이용했다. 역사학자 이태진은 ‘고종시대의 재조명’에서 “고종이 앞장서서 모은 신문물 관련 서적들을 포함한 각종 중국 서적들은 광무개혁의 밑거름으로 활용됐다”며 고종은 ‘동도서기(東道西器)·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화주의자’였다고 했다.

고종은 집옥재에 역대 왕들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이곳에서 외국 공사들을 접견했다. 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를 다섯 차례나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이태진은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자리이면서 어진이 봉안되고 있었다면 이곳이 왕의 집무처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집옥재 일대에는 현대사의 굴곡진 그늘이 남아 있다. 청와대 경비부대 주둔지였다. 1961년 군 부대가 들어섰고 1965년부터 1996년까지 정치군인의 산실이던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이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중령 시절 단장을 지낸 이곳을 1979년 12·12 쿠데타 아지트로 삼았다.

집옥재가 작은 도서관으로 변신해 그제 일반에 공개됐다. 기존 시설을 보존하면서 서가와 열람대를 새로 설치했다. 집옥재와 복도로 연결된 팔우정과 협길당은 각각 북카페와 열람실로 꾸몄다. 독서와 역사, 문화가 결합돼 근현대사가 살아 숨쉬는 장소다. 위기에 처한 나라에서 개화로 중흥을 이루려던 고종의 꿈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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