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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 국가를 지향했기에 의례를 중시했다. 길례(제사), 가례(혼례·책봉), 빈례(외국사신 접대), 군례(군사의식), 흉례(장례) 등 오례의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를 기본으로 하고, 의례를 집행하면서 그 과정을 세밀히 기록한 ‘의궤(儀軌)’를 편찬해 후대에 참고하도록 했다. 의궤는 ‘의례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왕실 혼례·장례, 세자 책봉, 궁궐 건축 등 국가행사 기간에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뒤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을 설치해 의궤를 편찬했다. 임금의 명령서, 업무 분장 관청의 공문서, 업무 담당자 명단, 동원 인원, 소요 물품, 경비지출 내역, 유공자 포상 등이 모두 의궤에 담겼다.

아름다운 기록화가 의궤의 특징이다. 행사에 쓰인 도구나 건물을 그리고 설명한 ‘도설(圖說)’과 의례 행렬을 그린 ‘반차도(班次圖)’ 덕분에 당시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끼고 세부 사항까지 파악할 수 있다. 반차도는 도화서 화원의 손으로 천연색으로 그려 의궤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정조가 1795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첫 활자본 의궤지만, 여기에 실린 길이 15m의 반차도가 더 유명하다. 김홍도, 김득신 등 당대의 대표적인 화원들이 그려 절정기 진경(眞景)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의궤를 보면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치밀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국정을 투명하고 소상하게 사실대로 기록해 정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저서 ‘조선왕조의궤’에서 “조선왕조에 들어와 의궤가 편찬된 것은 기록문화의 혁명”이라고 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왕조만의 독특한 기록문화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문화 수준을 의궤만큼 절실하게 보여주는 자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의궤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다.

의궤에는 고난의 역사가 남긴 상흔이 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의궤를 편찬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그 후 발행된 의궤만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소장 의궤 300여책은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2011년 임대 방식으로 반환됐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반출한 의궤 167책도 같은 해 환수됐다.

문화재청이 의궤 1757건, 2751책을 보물 제1901호로 지정했다. 조사 대상 3800여책 중 보관처가 확인되지 않은 활자본과 일제강점기 제작본 등은 제외됐다. 의궤가 이제야 보물로 지정된 것은 대조·확인 작업에 많은 시간이 걸린 탓이다. 역사의 상흔과 무관하지 않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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