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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인한 희로애락 도돌이표 글쓰기와 닮아”

입력 : 2016-05-26 21:53:44 수정 : 2016-05-26 22: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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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낸 권여선 권여선(51)씨가 다섯 번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를 펴냈다. 표제가 사뭇 도발적이다. 수록된 작품들 제목 중 하나를 창작집 표제로 뽑는 관행이 무너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이 소설집 안에도 동명의 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커밍 아웃’ 차원에서 편집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제목이다. 과연 이 소설집에 수록된 7개의 단편 어디에도 술은 빠지지 않거니와 각 작품들에서 술은 인간들이 빠진 깊은 수렁과 부조리한 운명을 애도하는 매개물로 작동한다. ‘주정뱅이’는 인생의 극본을 짜고 희롱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저항하는 작명으로도 읽힌다. 자, 그러니 우리는 주정뱅이가 될 테다, 아니 주정뱅이가 되는 길밖에 당신의 주사위놀이를 견뎌내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하소연 같다.

다섯번째 소설집을 펴낸 권여선씨. 그는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면서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고 썼다.
작가가 등단 이래 소설을 쓰면서 울기는 처음이었다는 첫머리의 ‘봄밤’은 처연하다. 영경과 수환은 마흔셋 봄에 친구 재혼식장에서 서로 만났다. 그날 수환이 취한 영경을 업어서 집까지 바래다준 인연으로 같이 살게 됐다. 영경과 수환은 인생에서 지독한 쓴맛을 이미 본 터였다. 영경은 결혼 1년반 만에 아들은 자신이 양육하는 조건으로 이혼했는데 전 남편과 시어미가 아들을 데리고 일방적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그네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수환은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10년 넘게 밑바닥에서 일하다 겨우 공업사를 차렸는데 거래처의 횡포로 부도를 맞아 위장이혼했지만 아내는 남은 재산을 들고 잠적해 버렸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노숙생활까지 하면서 ‘언제든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고’ 살아왔다.

이들 바닥 남녀가 애틋함을 서로에게서 보았으니 축복인데, 수환이 아파서 요양원에 들어간다. 영경도 아파트를 팔아 그이 옆에 있고 싶어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지만 술을 끊지 못해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며칠씩 외출을 한다. 영경을 배려해 외출시키고 수환은 숨을 놓았다. 혼수상태로 요양원에 실려온 영경은 알코올성 치매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가끔 누군가의 눈동자가 떠올라 오래 울기만 할 따름이다.

‘삼인행’은 이별여행을 떠나는 부부와 친구가 날선 대사로 공방을 벌이며 동해까지 가지만 삼인 모두 결국 마음속 미로로 접어들어 눈 내리는 술집에서 서울행을 포기한 채 술을 마신다. ‘이모’에 등장하는 남자 이름을 지닌 시이모도 기구하다. 어머니가 몰래 남동생 빚보증 서류에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바람에 빚을 갚으며 어머니 모시고 55세까지 홀로 살다가 2년간 잠적했다. 돌아와 췌장암으로 석달 투병하다 죽었다. 마지막에 이모의 눈에서 본 ‘새벽처럼 희고 맑고 시린 푸른빛’이야말로 작가가 이 세상 모든 주정뱅이들에게 깃들기를 바라는 희망 같다.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 켤레’ ‘층’에서도 어이없는 생의 함정들은 여일하게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모두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는 한 사람의 불행,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가 관찰하는 인간들, 우연을 빙자해 인간이 간섭하는 불행의 이면, 결정적일 때 훼방을 놓는 신의 장난 같은 것들이 그 어두운 구멍에는 녹아 있다. ‘층’의 한 사내는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를 후렴처럼 반복하는데 ‘카메라’에 나오는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놓아야 살 수 있어요”라는 죽은 애인의 누나 대사는 그 하소연과 짝을 이룬다.

광화문에서 만난 권여선은 “소설 쓰기와 술 마시는 일은 짧고 엄청난 기쁨을 주지만 길게 미련을 남기고 끝끝내 해갈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면서 “글을 끝내고 나면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겨 실수하지 않았나 돌아보는 것처럼 무언가 잘못 쓴 거 같은 폐인지경으로 몰린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일상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운데 글이나 술은 그 희석된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 줘야 할 때, 그대로 있으면 죽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쓰고 마시게 된다”면서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언어나 삶을 보는 시선이 계속 움직이고 흔들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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