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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사르륵, 봄눈처럼 녹아버린 애틋한 사랑 그렸다"

입력 : 2016-05-26 22:01:35 수정 : 2016-05-26 2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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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삿포로의 여인’ 출간 소설가 이순원 대관령 동쪽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스무살까지 살았던 소설가 이순원(59). 그에게 대관령은 단순한 고향 이상의 공간이다. 겨울이면 ‘눈을 뜰 수 없는 눈보라’와 ‘처마까지 닿는 눈’과 ‘밤이면 낮보다 하얀 밤’이 되는 순백의 공간이요, 낮은 지대에서는 볼 수 없는 마가목 같은 흔치 않은 식생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고원의 유토피아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어 그 공간을 떠나 대처로 떠돌았지만 대관령은 자석처럼 늘 그를 끌어당겼다. 그 고개에서 시작하는 ‘바우길’을 만들어 고향에 봉사하기도 했고 그 공간을 무대로 ‘19세’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등도 썼다. 그가 최근 6년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삿포로의 여인’(문예중앙)은 지난시절 대관령의 풍광과 사람을 보다 세밀하고 서정적인 배경으로 그린 작품이다. 봄눈처럼 스러지는 안타깝고 순수한 사랑이 긴 여운으로 남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대관령이 주인공처럼 다가오는 소설이기도 하다.
대관령을 무대로 서정적인 장편 ‘삿포로의 여인’을 펴낸 소설가 이순원. 그는 “대관령에 살다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면서 “봄눈처럼 서늘하고 순결한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삿포로에 갔더니 자연 환경이 대관령과 흡사하더군요. 거기가 위도는 위쪽인데 아래쪽 대관령은 고도가 높아서 날씨가 비슷합니다. 눈은 거기가 두 배 정도 더 와요. 눈이 쌓이면 방에 들어앉아 화투를 치는 사람들 머리 위로 눈 터널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요. 삿포로나 대관령 사람이 서로 출신지를 방문해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소설 속 연희가 뉘집 딸이냐고 물어 난감한데 삿포로와 대관령 사이에 봄눈 같은 사랑 이야기 하나 충분히 있을 법하지 않나요?”

이순원은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서 태어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그곳에서 살았다.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촌장이 존재하는 전형적인 유교 마을이다. 그는 여전히 갓 쓰고 노론과 남인을 말하는, 밤이면 캄캄한 그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 고교 1년 때 무조건 학교를 벗어나 외삼촌이 있는 대관령 위로 올라가 고랭지 배추농사에 참여했다. 그렇게 대관령에서 겨울을 두 번이나 났다. 소년 낭인으로 살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와 고교에 복학한 후 춘천 강원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어린시절부터 집에서 책을 많이 접했던 그는 글쓰기에는 그다지 큰 욕망이 없었는데 대학 2년때 당구장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실린 문예지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해 졸업 무렵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3년 후에는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우리시대의 석기시대’를 필두로 연작소설집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를 비롯해 지금까지 10권 넘는 장편소설을 써냈다. 술을 마실 때 술잔 숫자를 헤아리지 않듯 이번 장편이 몇 번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많이 써왔다. 그의 소설은 사회비판적인 맥락에서부터 서정적이고 시적인 글쓰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과시한다. 출세작인 ‘압구정동…’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광주’가 배경인 ‘얼굴’ 같은 단편을 통과해 ‘수색, 그 물빛 무늬’라는 서정적인 작품으로는 동인문학상을, 현실에 없는 고갯길을 만들어낸 중편 ‘은비령’으로는 현대문학상도 받았다.

“운이 좋은 건지 내 작품이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어요.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모두 실렸는데 발췌 대목과 시험문제 수준이 달라지는 게 차별점이라더군요. 여기저기 강연 요청은 많이 들어오는데 될 수 있는 한 작가는 글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은 없어요.”

강릉과 대관령의 상징적인 작가로 이미지가 굳어진 그는 고향을 위해 ‘바우길’ 개척 작업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사단법인 강릉바우길 이사장으로 전국 20여개 길 관련 단체 연합 ‘한국길모임’ 초대 상임대표까지 역임했다. 중편 ‘은비령’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계령의 한 고개를 무대로 쓴 소설인데 독자들이 그곳을 찾아가 실제 행정구역 지명을 무시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오히려 은비령이라고 우겨댐으로써 아예 실제 지명조차 바뀌었다고 한다. 현실에 없는 길을 소설가가 글로 만들어낸 셈이다. 이순원은 ‘글로 만들어가는 길’이야말로 작가의 길 아니냐고 말한다. 그는 글이 아닌 길을 만드는 현실의 모든 책무를 내려놓고 다시 글쓰기에만 매진하는 중이다.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날상 수상 소식으로 화제가 옮겨가자 이순원은 자신이 수상한 것처럼 반색했다. 

그는 “지난해 표절 파문을 거치면서 한국문학 자존심이 다쳐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들까지 많이 상처받았을 것”이라며 “참혹한 어둠 속에서도 지하로 강 같은 암반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 갑자기 용암이 터진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 작가들 단편만 놓고 보면 연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보다 더 수준이 높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변방의 언어를 쓴다는 것뿐이지 정교함과 깊이와 구성의 묘미에서 볼 때 한강 못지않은 뛰어난 작가들 작품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후배 작가들이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작금 소설에 서사가 약하다는 말이 많은데 이는 후배 세대가 사회로부터 차단됐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전 이순원 세대는 쉽게 직장에 들어가 부대낄 수 있었지만 이즈음은 웬만한 스펙을 쌓아도 사회 경험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적시한 맥락이다. 어려운 한국문학 창작 환경 속에서 전업작가로 살아가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헛헛한 답변이 돌아왔다.

“작품으로 ‘길’을 만들고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 들어가 있으며 인세로 먹고사는데 이런 나조차 엄살을 부리면 후배 작가들과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내 고향은 유교적 삶을 사는 400년 넘은 공동체 마을인데 내 안에 그런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바탕에 깊게 깔려 있지 않나 싶어요. 이번 소설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감성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뱀의 독을 다 빼도 뱀독은 남듯 추리소설을 쓰는데도 어쩔 수 없이 서정성은 감출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작가의 길을 걸어왔는데 더 다채롭고 깊은 작품을 쓸 겁니다. 가을 벼는 석양에 익는 법입니다.”

압구정과 수색과 대관령을 거쳐온 이순원은 역사추리소설로 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작정이라고 했다. 포르말린에 표백된 과거의 전형적 인물이 아닌, 현대인 곁에서 숨쉬는 듯한 인간형을 창출할 것이라는 다짐이다. 아내조차 읽고 울었다는 ‘삿포로의 여인’ 후기에 이순원은 썼다. 삿포로에서 태어나 대관령에 와서 사는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대관령에서 태어나 삿포로에 가서 사는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랑이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그들의 겨울눈 같은 사랑과 봄눈 같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그리하여 겨울눈은 무거워 운명적이고 봄눈은 미처 눈을 돌릴 사이 없이 녹아버려 안타깝다고, 나는 여전히 대관령의 봄눈을 기다린다고.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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