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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의 디지털세계] 영국 ‘적기조례’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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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5-27 21:59:24 수정 : 2016-05-27 22: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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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논리에 묶인 지도 서비스
증기차 중흥 망친 영국 연상
하나마나한 규제로 국민 불편
위치기반 산업 경쟁서 밀려
‘갈라파고스의 섬’ 될까 우려
영국의 ‘붉은 깃발법(적기조례)’은 어리석은 규제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증기엔진을 만든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에선 1820∼1840년 증기자동차 황금시대가 열렸다. 갓 싹튼 증기자동차산업을 망친 건 영국 정부의 엉뚱한 규제였다. 기존 마차·철도업체의 거센 반발에 영국 정부는 1865년 도심 차량 최고 속도를 시속 5마일(8km/h)로 제한하고 “자동차는 깃발 든 사람을 마차에 태워 붉은 깃발(낮)이나 붉은 등(밤)을 가지고 차량 55m 앞을 달리면서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적기조례를 시행한다. 당시 증기차는 이미 시속 30㎞를 넘나들던 시대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차보다 앞서 붉은 깃발·등을 단 마차가 달리면서 다른 마차·말 등이 놀라지 않게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성준 산업부 차장
1878년 개정된 적기조례는 마차 탄 기수는 없앴지만 여전히 전방 보행요원이 차량보다 18m 앞에서 차량 접근을 알리도록 했다.

적기조례는 1896년에서야 폐지되나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제2차 산업혁명의 주역인 자동차산업 주도권은 프랑스, 독일, 미국이 가져가게 된다.

인터넷 시대 지도를 둘러싼 우리나라 정부 정책은 적기조례를 연상시킨다. 분단국가로서 역대 정부는 지도를 군사정보로서 엄격하게 관리해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상세한 대축척 지도의 경우 정부 지정 판매처에서 성명, 주민등록번호 등을 적어야 구입 가능했다. 2004년 출간된 한 항공사진 서적은 국외 반출을 금지하며 구입자의 주민등록번호·이름·주소 등을 기록한 뒤 판매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 판매가 허용되기도 했다.

여전히 국내외 수많은 인터넷 지도 서비스는 비슷한 수준의 제한과 규제를 받고 있다. 네이버·다음 등에서 제공하는 지도나 내비게이션 맵에는 관광명소인 한국은행이 국가 보안시설로 감춰져 있다가 최근에야 등재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팔당댐 삼거리’, ‘소양강댐 관리단’ 등은 지도 검색으로 찾아볼 수 있어도 댐, 원전 자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도 보안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인터넷 클릭 몇번만으로 원하는 곳을 1∼2주 전 촬영한 해상도 50cm급 고정밀 위성사진을 누구나 촬영면적당 정해진 요금만 내면 앉아서 받아볼 수 있는 시대다. 정부는 지도 서비스 업체가 군사·보안시설을 흐릿하게 뭉개거나 녹지 등으로 위장하는 등 ‘블러’ 처리를 한 후 공개서비스하도록 고집하고 있는데 역으로 블러 처리된 곳만 찾아내 해당 시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추적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다보니 정부가 규제를 풀겠다고 대통령 주재 장관회의를 여는 날 구글이 작심하고 “규제로 인해 한국 산업 혁신이 막혀 있다”고 정면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필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 개혁 장관회의를 주재한 지난 18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구글, 한국의 지도 규제에 도전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구글이 글로벌 기업으로서 진출국 정부에 이처럼 각을 세우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구글은 “관련법이 시대에 뒤져 있고 불공정하다. 이로 인해 구글은 지도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지난 8년간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 금지’ 등의 규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입으로만 규제 철폐를 외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작심비판인 듯하다.

지도 보안에 대한 이 같은 정부 옹고집은 현대판 적기조례가 될까. 확실한 건 지도가 위치기반서비스의 핵심 인프라로서 그 확장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점이다. 자율주행차량 개발 등도 정교한 전자지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미 구글맵스는 해외 다수 국가에서 3D 지도, 자동차 주행정보, 도보방향, 자전거이동방향, 실시간 교통정보, 자동차 내비게이션, 내부지도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나 우리나라에선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구글맵스에서 파생되거나 자극받아 생겨날 수 있는 관련산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액티브X의 범람’처럼 정부 규제로 국내 관련 산업에 또 하나의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의 섬’이 만들어질 공산이 크다.

박성준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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