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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배우의 예술… 배고파도 버티는 이유”

입력 : 2016-06-15 21:32:32 수정 : 2016-06-15 21:5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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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드’로 주목받는 신성 박정복
“마티스의 그림 ‘레드 스튜디오’. …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 주위에서 고동쳤어, 난 푹 빠져버렸고 그림은 날 삼켜버렸지. 마티스가 만들어낸 그 놀라운 레드의 색면들, 에너지 넘치는 컬러의 형체들, 그 느낌!” 연극 ‘레드’에서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마티스의 빨강은 로스코가 그림에 담으려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열정, 고뇌, 추한 진실, 시간의 덫을 벗어난 영원성의 추구까지 생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아우른다. 기계적 일상과 허위를 고발하는 색이기도 하다.


연극 ‘레드’에 함께 출연 중인 강신일(왼쪽)과 박정복.
배우 박정복(33)도 요즘 붉은 에너지를 품고 산다. 이 연극에서 ‘켄’을 연기하는 그는 꿈을 향해 치열하게 달리는 중이다. 13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그가 배우가 된 과정을 듣고 나니 마티스의 빨강이 연상됐다. “저도 연극 ‘레드’랑 맞닿은 느낌이에요. 가슴 안에서 뭔가 끓고 있는데, 뭔지 모르게 분출하고 싶은 느낌이 있는데 참는 경우가 많았어요. 2011년 ‘레드’ 초연을 봤을 때, 배우들이 부딪치며 내뿜는 그 에너지가 제 기운과 맞다고 느꼈어요. 무턱대고 하고 싶어졌죠.”

지난해 초만 해도 그는 거의 무명 배우였다. ‘레드’의 켄 역할로 연극계에 데뷔한 건 4월이었다. 이후 하반기 ‘올드위키드 송’, 올 상반기 서울시극단 ‘헨리 4세’까지 굵직한 작품에 연이어 섰다. 난데없이 나타난 신인은 1년 사이 연극계가 눈여겨보는 배우로 떠올랐다. 그가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고교 3학년 때였다. 방송부 활동에 푹 빠진 그는 뮤직비디오 감독을 꿈꿨다. 감독을 하려면 연기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지난해 연극 ‘레드’에서 배우 정보석과 호흡을 맞춘 박정복은 올해 강신일, 한명구와 함께 연기한다.
남제현 기자
“배우 손병호 선생님에게 연기 수업을 받았어요. 뵙는 순간 배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어요. 배우는 왜 저렇게 멋있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공개수업을 갔는데,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그런 에너지와 열정. 와, 이들은 왜 이리 다른 세계에 사는 느낌일까.”

바로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했다. 대부분 그렇듯, 대학 시절도 푸르렀다. 2008년 대학을 졸업하자 그의 삶은 평이해졌다. 대학 조교를 하고, 예술고등학교와 학원에 출강했다. 저예산 단편영화 20∼30편쯤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드라마와 상업영화에서 단역을 했다. 연기를 가르치니 경제적으로 안정됐지만 치열하지는 않았다. 그는 “풍선이 부풀듯 열정으로 쭉 살았는데 졸업 시점에 바람이 확 빠졌다”며 “그래서 연기를 때려치려 했다”고 회상했다. 전환점은 2013년말 공연한 뮤지컬 ‘고스트’였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제작사 신시컴퍼니가 지난해 연극 ‘레드’ 출연을 제의해왔다.

“‘고스트’ 끝나고 ‘레드’까지 10개월쯤 공백이었어요. 당시 유혹이 장난 아니었어요. 재정적으로 힘들어지니 애들을 다시 가르쳐야 하나. 그런데 스스로 창피한 거예요. 나 이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버텼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다 했어요. 언제 섭외 받을지 모르니 단기알바로 여름에 호텔에서 수영장 파티 경호를 하고 파주 책공장 가서 책 포장하고 나르고, 조명 일도 했어요. 애들 가르칠 때보다 돈은 더 어렵게 버는데 행복하더라고요.”

‘레드’는 그를 배우로 다시 이끈 고마운 작품이다. 그는 “‘레드’는 연극하며 살아가는 동안 계속 되새기며 치열해질 수 있는 지침서”라며 “예술에 대해 로스코에게 계속 주입 받으며 어떤 배우로 살지 다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내달 10일까지 공연하는 이 작품은 화가 로스코와 제자 켄의 2인극이다. 1958년 로스코가 뉴욕 포시즌 레스토랑의 벽화를 의뢰받았다 파기한 사건을 파헤친다. 두 번째로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은 “이번에 보니 켄이 로스코의 또다른 자아나 어린 시절의 자기 같았다”고 해석했다. 로스코가 자신의 예술이 상업화되고 있지 않은지 켄을 통해 끊임없이 되묻는 느낌이라 한다. 이 연극에는 지적 즐거움을 주는 대사가 한가득이다. 박정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 번에 걸쳐 나오는 ‘레드요’를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로 꼽았다. 그는 “극 중 2년 사이 ‘레드요’의 의미가 변하는데, 이게 켄의 성장 같다”며 “마지막에 ‘레드’라고 말할 때는 켄의 도전과 미래 등 모든 걸 아우르는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 그는 연극에 무게를 둘 생각이다. “연극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쫓아다니고 조르겠지만 영상은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영화는 확실히 감독의 예술이지만, 무대는 배우의 예술”이라며 “두 달의 연습 기간에 똑같은 대사라도 왜 하는지 계속 생각하면서 대사가 단단해지니 배우가 느끼는 만족감은 연극을 따라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연극의 현장성이 주는 압박감도 피할 수 없는 매력이다. 하지만 연극 보수로는 생활이 어렵다. 그는 명랑하게 말했다.

“알바를 해야죠. 지금도 해요. 작품할 때도 쉬는 날에 나가요. 조명, 대리운전도 하고, 호텔 VIP 고객 선물 배송도 몇년째 하고 있어요. 연기를 가르치며 돈 번 몇년간을 돌이켜보니 남은 건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밖에 없더라고요. ‘고스트’ 이후 3, 4년이 훨씬 재밌고 편해요. 옛날엔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이걸 내려놓으니 사고 싶은 거 덜 사면 되고 어렵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만족해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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