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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원의 영화는 간데 없고 흔적만 쓸쓸히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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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07 10:00:00 수정 : 2016-07-06 20: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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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남쪽에서 험한 산길을 넘어오면 빠른 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물길이 시작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던 삼국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역사 여행만 하기에는 충주는 아쉽다. 남한강에서 각종 수상 레포츠를 즐긴 뒤 수안보 온천에서 뜨끈한 물에 푹 몸을 담그면 그간 쌓인 피로를 한 번에 날릴 수 있다.

외형은 화려하지 않지만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 중 제일 높은(14.5m) 충북 충주 탑평리7층석탑은 중앙탑으로 더 알려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중앙탑은 남과 북 끝에서 각각 보폭이 같은 사람을 출발시킨 뒤 만난 지점에 세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충주를 품어야 천하를 제패한다

백제, 고구려, 신라. 충주를 점령한 삼국의 순서다. 삼국은 최전성기에 충주를 각각 품었다. 백제는 정복사업을 펼친 근초고왕 때 영토가 강원도와 황해도 지역까지 뻗치면서 중원의 강자로 떠올랐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한강 유역에 진출한 뒤 장수왕 때 충주에 진출했다. 신라는 진흥왕 시절 충주를 지배한 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충주를 점령한 백제와 관련된 상징적인 유물은 딱히 없다. 삼국 중 최초로 점령했던 곳이기에 자신의 땅임을 외부에 알릴 필요가 없다 보니 특별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이후 충주를 점령한 국가들은 충주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공들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남겼다.
국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 석비인 충주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 석비다. 전체적인 외형은 중국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와 비슷하나 높이는 1m 내외로 작다. 이 돌이 고구려비로 판명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선 때도 임금이 이 지역을 찾았지만, 흔한 돌기둥으로 여기고 지나쳤다. 돌비석이 있다 보니 마을을 선돌마을 또는 입석마을로 불렀을 뿐이다. 그러다 약 40년 전인 1979년 그 가치가 알려졌다. 비문 판독에 들어갔지만 심하게 마모돼 앞면과 왼쪽 면 일부만 읽을 수 있었다. 이에 비석을 세운 시기 등 비문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남진정책을 편 장수왕이 충주 점령 후 세웠다는 설과 문자왕이 세웠다는 의견 등이 부딪쳤다. 그러던 중 비문에서 조부를 뜻하는 글자 ‘조’(祖)가 발견돼 충주를 점령한 장수왕을 기리기 위해 손자 문자왕이 세운 것으로 판명됐다. 해석된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이에 신라왕이 공손히 응하였다는 기록 등이 담겨있다. 특히 국가명이 ‘고려’(高麗)로 표기돼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를 ‘고려’ 또는 ‘고리’, ‘고구리’ 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비는 현재 원위치가 아닌 전시관 내에 있다. 전시관을 보면 겉모습은 ‘뭐 이렇게 생겼나’ 싶은 컨테이너박스 형태다. 이는 철갑옷을 입은 개마(갑옷을 입은 말)무사가 주력부대였던 고구려의 철기문화를 상징하려고 만든 것이다.

고구려비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충주탑평리7층석탑이 남한강을 끼고 우뚝 서있다. 충주탑평리7층석탑이란 이름보다 중앙탑으로 더 알려졌다. 외형은 화려하지 않지만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 중 제일 높은(14.5m) 탑이다. 이 탑 역시 건립 시기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학계에선 통일신라 원성왕(서기 785∼798년) 때로 추정하고 있는데, 탑 형태를 보면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문무왕 때라는 의견도 있다. 
탑신부와 상륜부의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세운 밥상 모양의 노반이 두 개라는 점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탑은 초기에 노반이 3개였다가 점차 줄어들었는데, 경덕왕 시기인 750년경 세워진 석가탑의 노반이 하나인데, 중앙탑이 그 이후에 건립됐다면 노반을 두 개나 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시기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한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다. 중앙탑은 신라가 통일한 뒤 남과 북 끝에서 각각 보폭이 같은 사람을 출발시켰더니 만난 지점이 중앙탑 자리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경치도 보고 남한강도 즐기고

충주에서 경치 구경과 수상레저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곳이 수주팔봉(水周八峰)이다. 달천 상류에 있는 수주팔봉은 물 위의 여덟 봉우리란 뜻으로 달천 건너편에 서있어 마치 병풍을 연상케 한다.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암봉에는 송곳바위, 중바위, 칼바위 등의 이름이 붙어있다. 한눈에 수주팔봉을 담기는 어렵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 고개를 돌려야 8개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충주 수주팔봉은 물 위의 여덟 봉우리란 뜻으로 달천 건너편에 서있어 마치 병풍을 연상케 한다.

수주팔봉은 마디가 끊겨 있다. 산줄기 중간이 끊어진 채 폭포가 떨어지는 곳이 있다. 팔봉폭포다. 높이가 낮지만 산줄기 가운데서 떨어지는 모습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폭포는 일제가 인위적으로 산을 깎아 만든 인공폭포다. 농지를 만들려고 일부러 산을 깎아 물길을 만든 것이다
. 조선 철종 임금이 여덟개 봉우리가 비치는 물가에서 노는 꿈을 꾼 뒤 장소를 수소문했는데, 수주팔봉이란 얘기를 듣고 직접 이곳을 찾아 달천에서 한동안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전국의 문물이 모이는 충주에서 가장 번잡했던 곳은 목계나루다. 1930년대 서울과 충주 사이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충주 남한강에서 수상스키를 즐기는 모습.
여행객들이 충주 남한강에서 바나나보트를 타고 있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 20여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지금은 옛 영화는 사라지고 터만 남아 쓸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름에 이곳에선 카누, 카약, 수상자전거, 고무보트 등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다.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 일원에서는 7월30일부터 8월7일까지 충주호수축제가 열린다.

충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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