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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청백리의 표상, 오리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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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19 20:40:00 수정 : 2016-07-19 2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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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여섯번 지냈지만 말년 초가살이
평생 국민과 나라 위해 봉사한 청빈의 삶
9월28일부터 시행될 ‘김영란법’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오가고 있다. 법의 적용 대상과 뇌물 수수의 범위 등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이 있고, 이 법의 시행으로 경제가 위축될 것을 지적하는 견해도 많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법이 나온 배경에는 일부 공직자나 사회지도층의 뇌물 수수 사례가 빈번하고 도덕불감증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최근에도 검사장의 거액 뇌물 수수, 공직자가 자녀 결혼식과 관련해 업체에 대규모의 청첩장을 보내는 등 일부 공직자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청렴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전통시대에도 꾸준히 전개됐다. 조선시대는 ‘청백리(淸白吏)’를 이상적인 관리의 전형으로 제시하는 반면 뇌물을 받은 관리인 ‘장리(贓吏)’에 대해서는 그 후손마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강력 규제했다. 오늘날 인사 청탁 금지법에 해당하는 분경(奔競) 금지법을 만들었다. ‘분경’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권세가의 집에 분주히 드나들며 엽관운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데, 분경 금지는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도 규정돼 있다.

현대에도 ‘청백리상’을 제정해 깨끗한 공직자를 포상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공직자로는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꼽을 수 있다. 실무 능력은 물론 인품, 도덕성, 청렴성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의 위기 극복에 최선을 다했고, 광해군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의 부담 경감에 큰 역할을 했다. 남인이었지만 서인 정권이 수립된 1623년 인조반정 후에도 바로 영의정에 임명됐다. 정국 안정의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80대의 고령임에도 관직에 나가는 등 이원익은 최후까지 공직에서 활동한 ‘영원한 현역’이었다. 평생을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살아갔지만 정작 자신은 초라한 초가에서 살았던 그의 삶은 실록의 졸기(卒記·압축적인 전기)에 표현돼 있다.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 상(上·인조)이 반정하고 나서 맨 먼저 그를 천거해 재상으로 삼고 매우 신임했다. 연로했으므로 궤장(?杖)을 하사해 편안하게 했고, 또 흰 요와 흰 옷을 하사해 그의 검소한 것을 표창했다. … 이원익은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致仕)하고 금천(衿川·현재의 광명)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 87세였다.” (‘인조실록’, 인조 12년(1634년) 1월 29일)

여섯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면서 몇 칸의 초가집에서 청빈한 삶을 살아간 공직자 이원익, 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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