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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 깊은 응어리, 운율에 실어 토해내다

입력 : 2016-07-21 20:36:48 수정 : 2016-07-21 20: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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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시인 4명 ‘시, 잠자는 나를 꺼내다’ 펴내 지난해 화제가 된 경북 칠곡군 할매들의 시집에 이어 최근에는 서울에서도 뒤늦게 한글교육을 받은 이들이 시집 ‘시, 잠자는 나를 꺼내다’(서정시학)를 펴내 눈길을 끈다. 지난해 5월 서울 노원구 상계동 마들주민회 부설 마들여성학교 ‘시 쓰기를 통한 치유인문학’에서 시를 배운 이들 중 4명이 담당교수였던 박미산 시인을 붙들고 1년 동안 더불어 가꾸어낸 결실이다.

칠곡 할매시인들 작품이 사투리와 맞춤법 틀린 것까지 그대로 옮겨놓은 날것이라면, 이들의 작품은 맞춤법을 다듬어 상대적으로 세련된 편이다. 기실 세련미나 기발한 상상력은 기성시인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이들의 시를 공통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그들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길어올린 진정성이다.

뒤늦게 한글을 깨쳐 시집을 낸 이명옥, 윤복녀, 유미숙, 김영숙씨(왼쪽부터). 이들은 지난 삶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
박미산 제공
“아줌마, 나 오늘부터 집주인 딸이에요./ 우리 엄마가 집주인 됐어요./ 그래서 내가 집주인 딸이 됐어요./ 그러니? 축하해. 너 참 좋겠다./ 싱글벙글 좋아하는 2학년짜리 딸아이/ 하루 종일 문 열어놓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싱글벙글/ 엄마 내 마음대로 해도 돼요?// 주인집 아이하고 싸우고 억울해 하면서 울어도/ 니가 참아, 집주인 딸이잖아,/ 이사 가라고 하면 어떡해./ 엄마 아무개가 내 동생을 때렸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걔네 할머니가 나를 야단쳤어요./ 그래도 니가 참아, 했던 나/ 많이도 우리 새끼 가슴 아프게도 했구나 싶다./ 내 가슴에 꼭 안고/ 미안해 내 새끼, 정말 미안하구나.”(‘내가 집주인 딸이에요’)

윤복녀(68)씨는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떡볶이 장사 등을 거쳐 어렵사리 집을 장만했을 때 어린 딸이 신이 나서 하루 종일 문을 열어놓고 ‘주인집 딸’이라고 외치던 모습이 가슴에 맺혔다고 했다.

이명옥(64), 김영숙(63), 유미숙(55)씨도 시쓰기 인문학교실 5주 과정을 마치고 윤복녀씨와 함께 박미산 시인을 졸라 한 달에 두 번씩 자신들이 써온 시를 놓고 합평회를 가졌다. 이들은 지나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같이 펑펑 운 적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었구나/ 꺼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까/ 못나고 아픈 것도 있는데/ 예쁜 것만 찾아 놓을까// 그래도 마음속에 한줄기/ 빛을 비추고 싶다./ 다 괜찮다고 모든 게/ 어우러지면 완숙되는 거라고/ 나를 꺼내 하늘로 날려 보낸다.”(‘시, 잠자는 나를 꺼내다’)

표제시를 쓴 김영숙씨는 큰 물난리로 가족을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살게 되어 공부는 엄두도 못 내고 동생 돌보며 집안일 하느라 학교를 중단했다. 손자까지 본 처지에 한글을 배우러 다닌다는 말을 차마 꺼내기 어려웠는데 큰 용기를 내어 학교에 나왔고 내친김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시까지 썼다.

재능 기부로 시쓰기를 이끈 박미산 시인.
월남한 부모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결혼까지 일찍해 고생길을 걸었던 이명옥(64)씨. 그는 남파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과 싸우다 “30년 살며 3남매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오빠”를 아프게 추억한다.

“‘아무도 없어요’ 하며/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쌀쌀맞은 목소리//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별러서 막내딸 손을 잡고 간/ 담벼락 높은 그 집// 거기는 아버지가 너무 사랑하는 맏딸을 보낸 집이다// 까치발을 딛고 대문 너머로 뭐든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집/ 그냥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는 아버지// 건드리면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은 아버지 손을 잡고/ 담벼락 높은 그 집을 등지고 다시 걸어간다”(‘담벼락 높은 그 집’)

북쪽에 부모 형제 아내 아들을 두고 내려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늘 흥얼거리던 유미숙씨의 아버지는 남의 집 애보기로 보낸 맏딸을 둔 채 행방불명이 됐다.

박미산 시인은 “시는 진정성이 생명인데 이들의 시는 자신들만의 구체적인 삶을 그대로 가져와 감동적이고 새롭다”면서 “누구든지 시를 쓸 수 있지만 과연 자기 내면에 있는 치부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영숙씨는 재능 기부로 그들의 아픔을 시로 치유해준 박미산 시인과 이현정 마들여성학교 교사에게 이런 시를 헌정했다.

“당신은 바람입니다./ 닫힌 마음 열어주니// 당신은 햇살입니다./ 찬 마음 녹여주니// 당신은 이슬입니다/ 새싹 돋우어 꽃피게 하니// 당신은 등불입니다./ 까막눈 뜨게 해주니”(‘선생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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