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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나를 유혹하지 못하면 타인을 유혹하는 것은 반쪽짜리”

입력 : 2016-07-21 20:37:09 수정 : 2016-07-21 22: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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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유혹의 학교’ 펴낸 재미 에세이스트 이서희 유혹은 사전적 의미로는 ‘꾀어서 좋지 않은 길로 이끄는 것’이라니 좋지 않은 대접을 받는 처지의 말이 분명한데, 이 말을 긍정적인 매혹으로 바꾸어내는 이도 있다. 아예 제목으로 끌어들여 ‘유혹의 학교’(한겨레출판·사진)라는 책까지 냈다. 재미 에세이스트 이서희(43)씨가 이 책에서 사용한 ‘유혹’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노력하는 존재들이라는 성찰에서 비롯된 말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그 유혹의 전제조건은 먼저 자신을 스스로 유혹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나를 유혹할 수 없다면, 내 삶이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면, 타인을 유혹하는 것은 반쪽짜리나 다름없었다”고 썼다. 그네를 만나보도록 유혹한 문장이다.

페이스북 글쓰기에서 출발해 에세이집을 펴낸 이서희씨. 그는 “우리가 익숙해진 유혹의 개념은 불필요한 오해와 불신을 껍질처럼 두르고 있다”면서 “나의 삶을 유혹하는 내가 되고 싶다”고 썼다.
이제원 기자
“책에 쓴 에피소드의 주인공들 중에는 삶의 어떤 지점에서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이 대단히 잘나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그것도 남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지점에서 얼마나 나와 당신이 빛나는가 알아가는 과정, 적극적인 의미에서 유혹은 그런 일종의 발견이자 발명인 거죠.”

광화문 구세군회관 옆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서 보자고 했다. 밖에서 사진을 먼저 찍고 인근 카페에서 얘기할 요량이었는데 비가 내렸다. 다크블루 레인코트에 보라색 줄무늬 우산을 들고 왔다. 비를 좋아한다고 포스팅한 걸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것 같다. 그네는 이즈음 각광받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대중에게 부각된 페북 문인 중 하나다. 감각적인 문장과 논리적인 사고로 남녀관계와 사랑과 관능에 대해 대범하고 솔직하게 올리는 그의 글을 눈여겨본 출판사의 요청으로 3년 전 ‘관능적인 삶’이라는 첫 책을 낸 데 이어 ‘유혹의 학교’를 내걸고 일간지에 칼럼까지 연재하다가 그 내용을 보충해 이번에 다시 책으로 묶어냈다.

“처음에는 저급하게 오해할까봐 연재를 주저했는데 단순히 남녀간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여정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처음부터 매력적인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그들이 매력적인지 발견하고 풀어내어 유혹적인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제가 한 것이죠.”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6년간 영화를 공부했고 결혼한 이후에는 14년째 미국에서 줄곧 살아왔다. 프랑스 유학시절 만났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못지않은 청량감과 감각적인 관능의 매력을 발산한다. 어떻게 그, 혹은 그들과 만났고 어떤 사랑을 나누었으며 어떻게 헤어졌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양손잡이 남자’와 만난 에피소드들이 깊이 다가온다. 영화 강사 중 하나였던 그에게 다가가 뜨겁게 과정을 누리는 장면들은 솔직하고 과감하며 섬세하다.

“함부로 썼다가 나중에 큰일을 당하면 어떡하느냐는 조언을 주변에서 너무 많이 들었어요. 감사하게 듣긴 하지만 저는 제 맷집을 믿어요. 제약된 삶을 산다고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그런 맷집은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은 무모할 수 있지만 그런 무모함 없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그네는 우수한 배치고사 성적을 받았고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법대 진학을 아버지로부터 강요받았다. 성장기에 폭력까지 휘두르던 가부장적 아버지는 법대만 들어가주면 원하는 걸 하도록 내버려두겠다고 한 달 동안 극렬하게 반발하는 그네를 달랬고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자 말을 바꾸었다. 반골기질이 유난히 강하다는 그네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결국 프랑스까지 가게 된 것도 다른 욕망을 주입하는 공간을 떠나 탈출하는 의미가 컸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매력적이고 당당한 여성이었는데 아버지 앞에만 오면 꼼짝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다양한 서사를 보지 못하면 다른 삶을 살지 못하게 돼요.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네 지옥을 만들어서 지옥에 중독돼 살아가는 거죠. 꿈꾸는 서사에 익숙해지고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각인돼 있지 않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제대로 된 내 꿈이 아니다고 말하기 힘들어요. 폭력을 사랑으로 오인하고 중독돼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두 딸을 데리고 책 출간에 맞춰 한국에 나온 그는 딸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짜릿한 관계를 폭력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여자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키워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도 왜곡된다는 것이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이란 표현에서 보듯 미모만 있으면 안 되고 지성까지 합산해서 점수를 매기는 식의 유독 여자에 대한 평가가 심하다고 했다. 갈수록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사고가 깨어나면서 사회와 마찰하는 면이 더 커지는 추세라고 본다.

“강남역 묻지마 여성 살인을 접하면서 그동안 여성으로서 겪었던 억울함과 슬픔 같은 것들이 밀려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강남역을 뒤덮고 디지털공간에 도배된 포스팅들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공포와 혐오를 감내하면서 살았구나 싶어 놀라웠어요. 저도 어릴 때 겪은 성추행에 대해 처음 말한 게 대학에 들어와서도 한참 지난 시점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오해받을까봐 아무에게도 도와 달라는 말도 못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 어떻게 처신을 잘못했으며 어떻게 남자를 유혹했을까요? 저는 아직도 힘들어요. 끊임없이 그런 수치심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써요. 내가 욕망하는 나, 자연스럽게 나인 나를 괴롭히는 면이 있지요. 그럴 때마다 너는 너여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거죠.”

이씨는 ‘자기 서사’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별도 유혹처럼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인데 모든 잘못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거나 잠적하는 행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용을 제대로 치르는 건 덤터기를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이를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지나치게 나무라지 않다 보니 왜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충분히 슬퍼하는 시간을 누리는 것, 돌아보고 평가하는 자기 서사 안에서 상대방이나 자신을 가해자로 만들지 않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밀란 쿤데라나 존 쿳시, 미셸 우엘백 같은 작가들의 ‘건조하고 날카로우면서 관능을 건드리는 지점’이 흥미롭다는 그네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각하게 하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그의 글쓰기는 이미 그런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자신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문단의 데뷔 방식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 페이스북에서 먼저 글을 쓰다가 자연스레 대중 독자들과 소통하게 된 그네는 실제로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이번 책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역에서 막막한 심정을 유리병에 띄워보내듯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네의 귀환이 기대된다. 어둑해지는 광화문에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는 ‘당신의 꿈속에 내리는 빗소리’에 썼다.

-네 꿈에는 비가 내리는구나. 소리만으로도 나는 젖을 수 있구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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