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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 연이은 녹취록 파문에… 정치권 “나 떨고 있니”

입력 : 2016-07-25 19:04:47 수정 : 2016-07-25 23: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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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대화서 술자리 농담까지 담아… ‘말실수 할까’ 노이로제
“통화 중 녹취에 대한 불안감에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게 되더라고요.” 20대 국회 들어 정치권에 처음 발을 디딘 보좌관 A씨는 최근 일련의 녹취록 파문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A씨는 지난달 몇몇 기자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녹취록 형식으로 돌고 돌아 얼마 전 자신에게까지 흘러들어와 충격을 받았다. 녹취록에는 다행히 민감한 내용은 없었지만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농담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A씨는 “이후 전화는 기본이고 민원인을 만날 때까지도 녹취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며 “혹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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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정국 뒤흔든 녹취록 파문

올해는 유난히 녹취록으로 촉발된 이슈가 자주 정국을 뒤흔들었다. 20대 총선을 앞둔 지난 3월초,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윤상현 의원이 당시 김무성 대표를 향해 막말을 하는 녹취파일이 공개됐다. 이 녹취록을 통해 공천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당내 계파정치의 민낯이 드러나며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김 전 대표는 윤 의원의 사과를 받지 않았고, 친박계 일각에서는 녹취가 김 대표 측의 ‘작품’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면서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다. 윤 의원은 결국 공천에서 컷오프됐고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윤상현 의원과 김무성 전 대표
지난 18일에는 윤 의원이 총선 공천 과정에서 김성회 전 의원에게 출마 지역구를 옮길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보도됐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친박계 맏형인 서청원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 화성갑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여기에 최경환 의원과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녹취록까지 공개되자 비박계는 친박계가 공천 과정에서 전방위적으로 공천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난 것이라고 반발했다.

앞서 지난달 말에는 2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KBS 보도국장과 통화한 녹취록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 수석은 해경이 세월호 침몰 직후 구조활동을 소홀히 한 점을 지적한 KBS 기사를 두고 “한 번만 도와줘 진짜. 하필이면 또 (대통령이) KBS를 오늘 봤네”라며 기사를 내려 달라고 거듭 사정했다. 야권은 ‘대통령발 보도지침’이라며 맹비난했고, 새누리당은 “청와대 홍보수석의 통상적인 업무”라고 방어하며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세월호 보도 통제’ 논란에 휩싸인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지난 6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8·9 전당대회 출마를 만류하는 한 지인의 문자를 보고 있다.
자료사진
더민주 이종걸 의원은 지난 21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연이은 녹취록 파문을 “박근혜 대통령 레임덕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내용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야권도 녹취록 파문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는 지난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비공개 회담 이후 녹취록이 공개되며 체면을 구겼다. 비공개 회담에서 이 여사 측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녹취를 한 사실이 알려졌다. 또 실제 녹취록에서는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안 전 대표의 언급에 이 여사가 “꼭 그렇게 하세요”라고만 답한 것으로 확인되며, 안 전 대표 측이 회담 성과를 과장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녹취 일상화’

녹취록 파문이 부쩍 늘어난 배경으로는 과학기술 발달이 꼽힌다. 초소형 녹음장치가 등장했고, 통화 내용을 간편하게 녹음할 수 있는 스마트폰 이용자가 늘어나며 녹취록과 관련한 사고도 자연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일상화된 녹취’의 원인을 과학기술이 아닌 사회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신과 감시의 사회 분위기가 녹취를 부추기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최근 연이은 녹취록 파문을 “사회 전반적인 도덕률이 깨지고 있다는 하나의 조짐”으로 진단했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 전체가 서로를 못 믿게 됐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각자도생의 사회”라며 “녹취는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지 않으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맞물린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 교수도 “어찌 보면 ‘녹취의 일상화’는 당연한 결과”라며 “나무(개인)가 아닌 숲(사회)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의 행동에 그대로 투영된다”며 “‘빅브라더(감시사회)’ 속에 사는 개인 사이에 녹취가 만연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길거리 사방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 경찰·검찰·국정원 등의 무차별 통신자료 수집 등을 통해 개인의 모든 정보를 소유·노출하는 사회에서, 개인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정보를 취득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윤 교수는 “윗물(사회)이 맑아야 아랫물(개인)도 맑은 법”이라며 “폐쇄회로 TV 등 사회적 감시를 용인하는 문화를 고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녹취록 공개로 생겨난 공익적 가치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최 교수는 “최근 불거진 ‘공천 개입’, ‘KBS 보도지침’ 논란의 경우 그로 인해 진실이 밝혀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녹취가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도 “녹취의 부작용을 지적한다고 해서 휘슬블로어(내부고발자)의 기능까지 위축시키는 것은 안 된다”며 “공익적 가치를 지닌 녹취와 일상 생활의 녹취는 반드시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녹취, 어디까지 허용되나

휴대전화 대화 녹취는 법적으로 어느 선까지 허용될까.

통신비밀보호법 제14조 1항은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하여 청취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가 대화를 엿듣거나 몰래 녹음하면 처벌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옛 안기부 도청조직 미림팀에 속한 공운영씨가 삼성그룹 이학수 전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사이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 뒤 유출했다가 2006년 6월 징역 1년6개월이 확정되기도 했다.

타인 간 대화와 달리 대화 당사자가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통화도 마찬가지다. 법에서 규정한 ‘타인 간의 대화’에 포함되지 않아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A가 B와의 대화를 녹음하던 중 의도치 않게 B와 C의 대화 내용까지 같이 녹음하게 됐다면 어떻게 될까. C의 발언을 녹취할 의도는 없었더라도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면 통비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다.

대법원은 유사한 사례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바 있다. 법원은 지난 5월 고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MBC 이진숙 전 기획홍보본부장의 2012년 대화를 휴대전화로 녹음한 혐의로 기소된 모 언론사 기자가 통비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의 선고유예를 내렸다.

당시 기자는 최 이사장과 통화를 한 뒤 휴대전화를 끊지 않은 채 두는 바람에 최 이사장과 이 본부장의 대화를 우연히 녹음하게 됐다. 법원은 녹음 행위 자체는 위법성을 인정하더라도 공익 목적으로 보도한 점을 감안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녹취 과정이 적법해도 그 내용을 타인에게 퍼뜨릴 경우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있다. 자신의 대화가 녹음된 녹취록을 누군가에게 알리거나 전달할 때 받은 사람이 그 내용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점이 인정되면 명예훼손 혐의가 적용된다. 그러나 ‘반의사 불벌죄’인 명예훼손은 피해자가 요구할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

박세준·이동수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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