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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동전 등 2만여점… 14세기 동북아 문화교류 생생

입력 : 2016-07-26 21:29:39 수정 : 2016-07-26 2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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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선’ 발굴 40주년 기념 전시회 1323년 6월 초 쾌청한 날씨의 어느 날, 배는 항구를 출발했다. 중국 저장성의 경원에서 일본 하카타로 나서는 참이었다. 60여명의 선원들은 바람만 잘 타면 짐을 가득 실은 배가 두 달 후에는 하카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한반도 남해안을 지날 무렵 거센 풍랑을 만났다. 배는 표류했고,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1975년 전남 신안의 앞바다,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병이 걸려 올라왔다. 이듬해부터 시작된 수중발굴은 1984년까지 11번 진행됐고 도자기, 금속기, 자단목, 유리제품 등 2만4000여점의 유물이 바다에서 올라왔다. 652년 전 배가 맞았던 비극적 운명은 당대 동북아의 교류를 증언하는 빛나는 유물들을 세상에 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9월 4일까지 열어 신안선의 실체와 규모를 전한다. 신안선 발굴 4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운 신안선 도자기 유물을 감상하고 있다. 박물관은 신안선 2만4000여점의 유물 중 전시가 가능한 것들 대부분을 출품해 신안선의 실체와 규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 방식을 택했다.
연합뉴스
◆보물창고를 열다


한국 수중고고학의 효시가 된 신안선 발굴은 압도적인 유물의 양에 먼저 눈길이 간다.

신안선은 크게 잡아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로 중량 200t급 이상의 당대 최대의 무역선이었다. 선원은 100명 넘게 태울 수 있었으나 당시 탑승자는 60명 정도로 추정된다. 선원들은 이 배에 각종 물건을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양으로나 질로나 단연 돋보이는 건 2만여점의 도자기다. 저장성 용천요 생산품이 60%를 넘어 당시의 폭발적인 수요를 보여준다. 장시성 경덕진요의 청백자, 길주요의 자기, 푸젠성 건요의 흑유 자기도 주목된다. 박물관 관계자는 “당시 중국 도자기는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 아프리카까지 대량으로 수출됐다”며 “신안선의 용천요 청자는 일괄 자료로는 수량이 가장 많다”고 설명했다. 고려청자 7점도 함께 발견됐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려청자를 ‘천하제일’로 꼽았던 만큼 중국으로 수출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들로 짐작된다.

신안선은 무게 28t, 개수로는 800만개에 이르는 동전도 배의 중간과 꼬리 부분에 싣고 있었다. 용도는 두 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동전을 녹여 청동대불을 만들려 했다는 분석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화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다. 12∼15세기 일본에서는 중국 동전이 시중에 활발하게 유통돼 화폐경제가 활성화됐다. 최근에는 화폐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박물관은 신안선의 실체와 유물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 수장고에 묵혀 두었던 것 대부분을 꺼내 전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영훈 관장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신안선 문화재 전시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들만을 대상으로 해 공개된 것은 1000여점에 지나지 않았다”며 “(전시가 가능한 모든 것들을 이번 전시회에 출품했기 때문에) 신안선의 실체와 당시 동아시아의 교류 양상을 더욱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4세기 일본 지배층은 중국에서 수입한 ‘가라모노’로 차를 마시거나 향을 피우며 중국문화를 즐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차·향·꽃… 고급문화를 공유하다


전시회는 관람객들에게 재밌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침몰하지 않았다면 신안선의 화물은 일본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대답을 찾다 보면 당시 중국, 일본 간 문화교류의 양상이 드러난다.

신안선 유물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차, 향, 꽃과 관련된 것들이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는데 승려, 관료, 무사 등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거나 꽃을 즐기는 것이 인기를 끌었다. 이를 위해 수입한 다양한 중국제 기물을 ‘가라모노’라 부르며 선호했다. 가라모노에 대한 지배층의 선호는 신안선과 같은 무역선의 원동력이었다.

신안선에 나온 60여점의 검은색 다완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에도 시대에 그려진 한 그림에는 방의 한쪽 구석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검은색 다완이 묘사돼 있다. 일본에는 푸젠성 건요에서 제작된 다완 4점이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의 복고 양식 향로가 신안선에 많이 실려 있던 것도 일본 내 중국문화의 유행을 증언한다. 복고풍은 당시 상당한 유행이 되어 서민층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도자기 향로는 이런 수요에 대응한 것이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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