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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바래질 가던 '엄니'들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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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11 14:00:00 수정 : 2016-08-10 19: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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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있어 더 애처로운 그 섬, 남해
경남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은 바로 앞이 바다지만 파도가 심해 어로 작업을 못하는 농촌 마을이다. 주민들은 설흘산 줄기에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이 있으면 작든 크든 층층이 논을 일궜다. 그렇게 일구어낸 다랑논(다랭이논)이 108개층에 걸쳐 680여개에 이른다.
남해는 멀지만 한 번 찾으면 그 매력에 푹 빠져드는 곳이다. 동해와 서해의 매력이 적절히 섞인 곳이기 때문이다. 맑고 푸른 바다와 갯벌로 각각 대표되는 동해와 서해의 특징이 남해엔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중 남해군은 부산에서 전남 해남까지 이어진 남해의 가운데 자리한 곳이다. 남해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듯 이름조차 같다. 제주, 거제, 진도, 강화 다음으로 면적이 큰 섬이 남해다. 남해도와 창선도 등 약 70개의 섬으로 이뤄진 남해는 바다와 땅에서 풍부한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여성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마지막 호령을 한 장소도 남해 앞바다다. 아름다운 풍광 외에도 우리 조상의 삶과 역사를 한 자락을 품고 있는 곳이 남해다.

◆희망을 놓지 않은 ‘엄니’들의 바다

바다는 육지보다 여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집안일과 농사일은 물론이고 바닷속 해산물을 따는 물질까지도 여자들 몫이었다. 바다에 들어가 뭐라도 건져오면 먹거리이자 돈이 됐기에 ‘엄니’들은 억척스러웠다. 우리 ‘엄니’들은 제 몸보다는 제 ‘새끼’ 건사하겠다는 마음으로 힘든 물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해에선 우리 ‘엄니’들이 물때에 맞춰 갯벌과 갯바위 등에서 해산물을 캐러 나가는 것을 바래질하러 간다고 한다.

다랭이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바래질하러 가던 그 길이 이제는 여행객들에게 남해의 삶과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길로 변했다. 남해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기는 쉽지 않다. 버스 편도 많지 않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가능하면 승용차로 다니는 것이 좋다. 차를 가지고 다닌다면 앵강다숲마을에서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바다 풍경을 보며 달려보자. 바래길 2코스로 앵강만을 끼고 돈다.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중간중간 남해에 살던 조상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길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걸어도 좋다. 차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곳에 숨어있는 풍광을 마음껏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앵강다숲마을은 갯벌에서 고둥, 바지락, 개불 잡기 체험 등이 가능한 전형적인 어촌체험마을이다. 앵강은 남해도 남쪽으로 움푹 들어간 만을 말한다. 항아리가 누워있는 것 같다 해서 사투리로 ‘앵강’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앵강만의 구슬픈 파도 소리가 앵무새의 노랫가락 같아 ‘앵강(鸚康)’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석방렴.

무엇보다 이 마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다 가운데 반원 모양으로 둘러쳐진 돌무더기들이다. 물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방식인 석방렴이다. 돌로 쌓은 담은 밀물 때 잠겼다가 썰물 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물이 빠져나갈 때 돌담에 막혀 먼바다로 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손쉽게 잡을 수 있다. 석방렴은 남해에서 개막이, 석전, 석제, 돌밭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석방렴에서 물고기 잡기 체험을 하려면 홍현리 해라우지마을로 가는 것이 좋다. 앵강다숲마을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곳이다. 10월까지는 물때에 맞춰 석방렴 체험을 할 수 있다. 현대의 기술로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자연의 섭리를 이용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50명 정도 돼야 체험을 할 수 있고 매일 물때가 달라지니 미리 연락(055-863-5885)을 하고 가야 한다.

홍현마을은 무지개마을로도 불린다. 이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무지개를 따라간 뒤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던 아내가 딸을 데리고 무지개 끝을 향해 걸어갔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얘기에서 비롯됐다. 고기잡이를 하러 나간 남편이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한 일이 많자 이를 무지개에 빗대서 만든 얘기인 듯싶다. 이에 반원 모양의 석방렴은 마을 항구에서 바다 방향으로 걸으면 ‘꿈을 이루는 길’이란 의미가, 바다에서 항구 방향으로는 ‘사랑을 이루는 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바다로 나갈 땐 만선의 꿈을 이루길 바라고, 마을로 돌아올 땐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랭이마을의 출렁다리.

체험을 끝낸 후엔 가천 다랭이마을로 향하자. 다랭이마을은 농촌 마을이다. 바로 앞이 바다지만 파도가 심해 어로 작업을 못한다. 이에 주민들은 설흘산 줄기에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이 있으면 작든 크든 층층이 논을 일궜다. 그렇게 일구어낸 다랑논(다랭이논)이 108개층에 걸쳐 680여개에 이른다. 면적도 9.9㎡(3평)부터 990㎡(300평)까지 다양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암수바위다. 남성을 상징하는 바위와 임신한 여성 모양의 바위가 있다. 또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밥 무덤’인 돌탑도 서 있다. 태풍 등으로 피해를 보지 않게 매년 제를 올리는 곳이다. 마을에선 가능하면 출렁다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자. 마을 중간에서 보는 것과 달리 다리 있는 곳까지 가면 소리가 달라진다. 파도에 돌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다. 이 마을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 소리가 하도 커 잠을 잘 못 잤다고 한다.
뭍으로 옮겨진 이순신 장군의 주검 자리에 세운 이락사.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호령을 한 바다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 장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전쟁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다. 바로 이 장군이 이 말을 남긴 곳이 남해 앞바다 노량이다. 엄밀히 말하면 노량은 남해 북부와 사천 사이 해협을 말한다. 이곳에서 전투를 하다 왜적을 서남쪽에 있는 관음포까지 몰아가 궤멸시켰다. 이 장군이 순국한 장소는 관음포 부근이다. 관음포 부근 바다에서 이 장군의 주검이 처음 뭍으로 옮겨진 곳이 지금의 이락사(李落祠) 자리다. 이씨가 떨어진 곳에 세운 사당이란 뜻이다. 이락사와 또 다른 현판인 ‘대성운해(大星隕海: 큰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글씨가 모두 다른 사당과 반대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쓰여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이락사에서 500m가량 들어가면 첨망대가 나온다. 바로 이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를 볼 수 있게 조성된 누각이다.

이락사에 올려진 이 장군의 시신은 남해 북부로 옮겨진다. 당시 뭍으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 장소로 노량해협 부근이다. 이락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떨어진 곳으로 우리나라 첫 현수교 남해대교 인근의 충렬사가 그곳이다. 이곳에서 내륙으로 옮기기 전까지 주검을 모셔뒀는데, 충렬사 안에 들어가면 가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해=글·사진 이귀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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