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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정의 웰컴 투 파타고니아] 인적없이 낯선 여정 바람만이 길벗이 되었다

입력 : 2016-09-23 10:00:00 수정 : 2016-09-21 20: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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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트랙'의 둘째 날, 쿠에르노스 산장까지
쿠에르노스 봉우리를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산장.
이른 아침 햇살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황홀하다.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몸이 가볍다. 창문을 열어 산 위에서 불어오는 파타고니아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바람이 부는 창밖의 풍광이 오랜 풍경화 한 폭 같다. 건물 앞에 사람들이 모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무엇인가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아쉬움에 흩어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재규어란다. 동행한 동료도 처음 보는 것이라며 흥분한다. 살포시 뒷모습만 보았던 그 물체가 재규어라니. 낯선 두려움보다 자세히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숙소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열어보니 샌드위치와 물이 들어있다. 유리병에 담긴 주스는 어제 마시고 비운 플라스틱 물병에 옮겨 담았다. 유리병 무게도 지칠 때는 부담되기 때문이다. 산속은 휴지통도 없어 고스란히 내 몫이다. 오늘 일정은 라스 토레스 호텔에서 쿠에르노스 산장까지 가야 한다. 거리는 12㎞로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하이킹 길을 따라 파타고니아의 절경을 감상하며 걷는 힘들지 않은 코스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길 오른쪽으로 산을 두고 왼쪽으로는 노르덴스크홀드 빙하호수를 끼고 걷는다.

조금 걷다 보니 커다란 짐을 메고 가는 젊은 남자 셋이 보인다. 그들의 배낭 크기는 여행객이라기에는 너무나 커보인다. 정수리 위 한 뼘만큼 솟은 배낭 높이를 보니 짐을 운반하는 이들인지 기나긴 여정의 트레커들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반대편에서는 말들이 다가온다. 짐을 싣고 움직이는 중이다. 한 사람이 네 필의 말을 끌고 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또다시 걷는다.
파타고니아에서 트레킹을 하다 보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여행객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바람이 인다. 아무도 없는 길 위를 혼자 걷고 있는 여행객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고맙게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준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 외로운 길 위를 바람을 벗 삼아 걷는다. 오른편의 빙하 호수도 내 곁을 따르고 있다. 수만년 전의 빙하가 흘러 내려 크고 작은 호수가 돼 길동무가 되어 준다. 바람결에 대답하듯 출렁이며 때로는 청록색을 띠고 때로는 하늘 같은 파란색을 띠며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수만년의 시간을 함께하듯 거슬러 산길을 오르니 시야 저 멀리서 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안데스 산맥이 손짓한다. 오늘의 목적지가 있는 쿠에르노스 봉우리가 저 멀리 바위 절벽을 두르고 솟아 있다. 사이좋은 형제처럼 솟아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구름과 만년설을 두른 채 외로운 여행객을 굽어본다. 그 뒤로는 파이네 그란데 봉우리들이 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서 구름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산들이 보이고 사라지며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갯길이 휘어질 때 보이는 몇몇 트레커는 나의 뒤에 서기도 하고 앞에서 이끌기도 한다. 간혹 마주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산장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다. 나와는 반대 코스로 W 트랙을 걷고 있다. 가면서 보는 풍경과 오면서 보는 풍경은 또 많이 다를 것이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꺼낸다. 간소한 식사지만 차갑고 상쾌한 바람과 아름다운 호수, 병풍 같은 산봉우리가 함께하니 어느 진수성찬보다 화려하다.

다시 길을 나선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 처음 만나는 빛깔의 나무 열매들과 산새들이 붙잡는다. 듬성듬성 뻗은 가지들은 지난 시간의 바람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낮은 키로 바람결에 이리저리 쓸리며 나를 맞이한다.

산길을 돌아 접어드니 쿠에르노스 봉우리를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여러 채의 산장들이 보인다. 활기찬 분위기의 산장에는 어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도 보인다. 다른 시간에 출발해 마주치지 못했지만 숙소에 이르러서야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이 산장에서 안내를 받기 위해 기다리면서 쿠에르노스 봉우리 아래 차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를 즐기고 있다. 

나 역시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잠시 쉬었다. 하루 종일 고단하게 움직이느라 뜨거워진 발의 열을 식힌다. 안내데스크 겸 식당이 함께 자리한 장소에서 칠레산 컵라면이 눈에 띈다. 매콤한 고향의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하나 시켜놓고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니 더없이 여유롭다. 미리 도착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하루 종일 적막한 가운데 듣게 돼 반갑다.
하늘 가득 수놓은 듯한 남반구의 낯선 별들이 북반구에서 온 손님을 반긴다. 어둠 사이로 달빛에 비친 산봉우리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예약한 방에 들어가 저녁식사 시간까지 잠시 쉬기로 했다. 산장 아래 나무로 만든 자쿠지 안에 몇몇 미국 젊은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들어와 피로를 풀라며 권했지만 좁은 공간에 함께하기 낯설어 사양하고 식사 장소로 내려갔다. 나무 식탁에 빼곡히 앉아 차려주는 따뜻한 수프와 돼지고기를 먹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식사를 마치니 어느새 밖은 컴컴하다. 어둠 사이로 달빛에 비친 산봉우리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하늘 가득 수놓은 듯한 남반구의 낯선 별들이 북반구에서 온 손님을 반긴다. 장작불을 피운 난로가 산장의 자그마한 방 안에 온기를 전한다. 창밖으로 쏟아질 듯 흘러내리는 별빛 아래서 하루를 마감했다.

여행가·민트투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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