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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지진보다 더 겁나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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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3 01:19:05 수정 : 2016-09-23 01: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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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에 39년째 맞서는 일본
경주서 헛발질만 계속한 한국
유령 정부, 유령 법제 때문에
언제까지 각자도생해야 하나
유령 회사, 유령 계좌만 있는 게 아니다. 유령 지진도 있다. ‘도카이(東海) 지진’이 그런 존재다. 이 지진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일본인 머릿속과 관청 서류 등에만 존재한다. 상상 속의 괴물일지도 모른다. 일본 정부는 그런데도 이것에 이름을 붙이고 피해 예상 지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규모 8로 터질 자연의 분노를 겁내면서.

태풍은 발생해야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지진도 마찬가지다. 도카이 지진은 예외적이다. 존재한 적 없는 지진에 이름이 붙은 것은 도카이 지진이 처음이다. 1976년 “시즈오카(靜岡)현 중심의 도카이 지방에 내일 당장 대지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학계 주장이 부각된 것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해당 지역에서 100∼150년 주기로 대지진이 이어졌다는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한 경고였다. 파장이 컸다.


이승현 논설위원
일본의 예의주시는 한가한 관찰활동이 아니다. 일본은 1978년 ‘대규모 지진 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유령 지진에 대비한 특별법이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내진설계 강화를 독려했다. 방재 훈련도 실시한다. 지금껏 39년째 그렇게 하고 있다. 기구도 설치했다. ‘도카이 지역 판정회’다. 도카이 지진을 예측해 통보하는 기구다. 일본 총리는 즉각 ‘경계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2001년엔 자동으로 경계 선언을 발표하는 대신 3단계로 경보 등급을 나누고 당국 대응도 차별화하는 것으로 청사진을 손질했다. 지진 예측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실제 대응엔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점을 감안한 미세 조정이다. 일본은 지진 실제상황만이 아니라 유령 지진과도 결연히 싸우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무방비 국가’ 몰골이다. 7월 울산 앞바다 지진에 이어 9월 경주 지진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토록 선명히 대비될 수가 없다. 가장 큰 애물단지는 정부다. 19일 경주에서 규모 4.5의 여진이 발생하자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2시간여 동안 먹통이 됐다. 긴급재난문자 발송에는 5∼12분이 걸렸다. 개전의 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정부가 헛발질만 계속해 사회 혼란과 혼선을 부추기는 꼴이다.

만에 하나, 전에 겪어보지 못한 강진이 한반도를 덮치면 어찌 되겠나. 정부엔 기대할 것이 없다. 누진제 전기료 논란에는 “에어컨 4시간만 틀어라”라고, 미세먼지 공포에는 “주범은 고등어”라고 했던 식으로 또 사후에 헛소리나 해댈 것이 뻔하니까. 국민이 일본산 생존가방을 챙기는 등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것은 합리적 귀결이다. 미래의 강진에도 각자가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언론은 연일 영남 민심이 흉흉하다고 전한다. 영남만이겠나. 전국이 뒤숭숭하다.

우리도 기본 법제는 튼실하게 짜여 있다. 헌법 제34조는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훌륭하다. 개별법으론 재난 관리 기본법도, 지진 재해 대책법도 있다. 정부 조직도 방재 선진국인 미국, 독일, 일본에 못지않게 화려하다. 올 예산을 3조원 이상 쓰는 안전처가 엄존하고 최고 재난 관리기관인 중앙안전관리위원회 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국민은 불안에 떤다. 알고 보면 허깨비나 진배없는 부실 정부, 부실 법제인 까닭이다.

일본 지진 보도에는 “이번은 도카이 지진이 아니다”라는 진단이 따라붙는다. 약방의 감초다. 유령 지진에 꾸준히 맞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요즘엔 78년 특별법의 대상 지역을 확대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난카이(南海) 해구에서 발생할 규모 9의 대지진에도 대비한다는 것이다. 국민 생명을 지키려는 전쟁이다. 국가자원을 허투루 쓰는 과잉 대응일까. 천하태평인 우리 정부라면 그리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진 다발국가의 생존 지혜가 담겨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에겐 결연히 맞서 싸울 유령 지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진 안전지대여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지구상에 없다. 그저 유령 지진을 제시할 조심성 많고 책임감 있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유령 정부, 유령 법제뿐이다. 지진보다 더 겁나는 허깨비들이다. 이것들과는 대체 어찌 맞서 싸워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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