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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걸을수록 느껴지는 1000년 전 역사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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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20 10:00:00 수정 : 2016-10-19 20: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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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볼 곳 많은 홍성 1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충남 홍성은 고려 초까지 운주(運州)로 불렸다. 운주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운주전투에서 승리한 뒤 충남 서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너른 평야와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운주는 크게 성장했고,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고려 현종 때 홍주(洪州)로 이름이 바뀐 뒤 조선시대까지 이 지명을 유지하며 충청도 서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는 내포 땅이 가장 좋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바닷물이 육지까지 들어오는 지역을 뜻하는 내포는 홍성, 서산, 당진, 예산 등 10개 고을을 말하는데, 이곳의 중심이 홍성이었다. 이 같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역사적으로 저항의 기반이 됐다. 시대별로 저항의 대상은 달랐지만, ‘충(忠)’과 ‘의(義)’를 뜻하는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엔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고 그 땅이 넓고 기름지며, 그 백성이 번성하여 난치(難治)의 고을로 불려왔다’고 적혀 있다. 이에 홍성을 둘러보면 홍주란 지명에 익숙해진다. 1000년을 이어온 지명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홍성 여행의 시작은 홍성군청에서 시작된다. 100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길이 군청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군청이 홍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홍주성의 남문인 홍화문
홍주성은 조선 세종 때 쌓은 석성인데 그 이전 토성이 있었다. 성곽은 총 1.7㎞에 이르는데 지금은 800여m밖에 남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헐린 데다 1978년 홍성 지진 때도 일부 무너졌다.

남문인 홍화문 근처엔 병오항일의병기념비가 서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해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나 당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홍주성을 탈환했지만,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기념비가 있던 자리는 전에 ‘애도지비’가 있었다. 항일의병 당시 죽은 관군과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을 쓴 비석이다. 해방 후 이 비석을 없애고 의병기념비를 세웠다.

홍주성 내에 있는 병오항일의병기념비
비석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군청이 있는데 주위로 안회당, 여하정 등 홍주성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안회당(安懷堂)은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동헌으로 매우 소박하다. 안회란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다.

여하정은 홍주성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정자 옆의 왕버들나무는 여하정을 보호하려는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안회당에서 바라보는 뒤뜰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뒤뜰엔 작은 연못과 정자 여하정, 왕버들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1896년 연못 위에 지어진 수상정인 여하정은 홍주성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정자 옆의 왕버들나무는 여하정을 보호하려는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홍주성에서 차로 10분가량 이동하면 홍주의사총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산행코스인 매봉재와 홍주향교, 벽화거리를 둘러볼 수 있다.

홍주의사총은 1906년 항일의병 당시 홍주성 전투에서 죽은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홍주의사총은 1906년 항일의병 당시 홍주성 전투에서 죽은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의사총을 조성할 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에서 구백의총으로 했다가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1906년 항일의병은 홍주가 홍성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 1914년 일제는 홍주와 인근 고을 결성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 홍성으로 지명을 바꿨다. 어느 지역보다 홍주의 항일의식이 높다 보니 지역 특성을 희석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

충남 홍성 홍주의사총에서 매봉재로 가는 길목에 가을을 알리는 꽃들이 활짝 펴 있다. 매봉재는 낮은 산자락으로 정상 부근에 매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매바위는 인근의 학교를 지을 때 사용돼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의사총 뒤편의 홍주의병추모탑을 지나면 매봉재로 이어진다. 매봉재는 낮은 산자락으로 정상 부근에 매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홍주 백성들이 국상이 있을 때마다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곳으로 최영 장군이 어렸을 적 이곳에 놀러와 바위를 손바닥으로 눌러 평평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매바위는 인근의 학교를 지을 때 사용돼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매봉재 산책로 끝자락에 있는 홍주향교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벽화거리엔 1970∼80년대 고등학생들이 놀던 모습 등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한다.
매봉재 산책로 끝자락에 있는 홍주향교를 지나면 벽화거리다. 1970∼80년대 고등학생들이 놀던 모습, 향교에서 공부를 하던 도령들의 모습 등을 재미있게 그려 중장년층에겐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홍성에선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단순히 그 지역에서만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들이 많이 난 곳이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지은 시 ‘님의 침묵’과 한용운 선생 사진
복원한 김좌진 장군 생가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 조선시대 사육신 성삼문, 독립투사인 한용운, 김좌진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곳 태생이다.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다. 홍성의 서편엔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생가가 있다. 김좌진 장군 생가엔 그의 인생 여정과 청산리전투 전황도 등을 설명한 전시관이, 한용운 생가엔 삶과 문학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체험관이 조성돼 있다. 반면 동쪽에 있는 최영 장군 사당,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상대적으로 허한 편이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엔 그의 유품을 모아 만든 가묘가 조성돼 있다. 그의 시신은 팔도로 나뉘어져 보내지는 조리돌림을 당했는데,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이 일부를 수습해 서울 노량진에 가묘를 세웠다.

 
홍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가 일몰이다. 속동전망대는 밤섬 너머로 지는 석양과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 등이 유명하다.
홍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가 일몰이다. 대표적인 곳으로 궁리포구와 속동전망대가 있다. 궁리포구는 마을지형이 활처럼 생겨 이름 붙여진 곳으로 천수만을 끼고 있고, 안면도가 지척이다. 궁리포구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속동전망대는 밤섬 너머로 지는 석양과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 등이 유명하다.

홍성=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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