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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에 충실 하겠지만 담아내는 그릇은 다를 것”

입력 : 2016-10-23 20:16:15 수정 : 2016-10-23 2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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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드’로 오페라에 첫 도전하는 연출가 고선웅 “네. 전 노자·장자 사상의 팬이에요. 무위자연 좋아하죠. 분별하고 따지는 거 싫어해요. 지금도 어디서든 노자·장자 책만 보이면 펼쳐봐요. 읽기만 하면 마음이 훅 내려가니까요.”

오페라로 시작한 대화가 도가 사상으로 흘러갔다. 서양 오페라와 노장 사상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은데, 연출가 고선웅(48)은 둘을 이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고선웅이 오페라 연출에 처음 나섰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올리는 베르디의 ‘맥베드’를 진두지휘한다. 내달 24∼27일 공연을 앞두고 사흘째 연습에 들어간 그를 서울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만났다.

고 연출과 베르디 ‘맥베드’의 공통분모는 셰익스피어 희곡이다. 고 연출은 2011년 액션활극 ‘칼로막베스’를 통해 셰익스피어 원작을 재해석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맥베드’를 집중분석하며 동양 사상과 맞닿은 철학을 느꼈다. 그는 “대사 중에 보통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로 번역하는 ‘Fair is foul, foul is fair’가 있는데 저는 이를 빈 것은 차 있고, 찬 것은 비어 있다고 봤다”며 “색즉시공 공즉시색, 결국 무상함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오페라단 ‘맥베드’를 연출하는 고선웅은 “저는 하나하나 따지고 섬세한 선택들을 하며 작품을 만들지만, 나중에 완성됐을 때 이런 과정이 하나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며 “작품을 봤는데 고선웅이 선명히 드러난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안 좋다. 연출선이 보이면 밉상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집착해도 소용 없다, 네가 상대를 놓아줄 때 비로소 갖는 거야, 세상을 갖고 싶으면 세상을 놓아버려, 다 같은 맥락이죠. 맥베드는 천하를 호령할 상이라는 말에 홀려 야망을 키워요. 결국 왕권을 차지하지만 아무것도 남는 게 없죠. 제가 광고회사 다닐 때 윗분이 ‘회사는 부도를 끌어안고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어요. 생명은 죽음을, 탐욕은 자멸을 끌어안고 태어나요. 탐욕스러운데 승리하면 드라마가 아직 진행 중인 거죠. 그 결말을 다들 알잖아요. 이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느냐가 문제죠. 노래뿐 아니라 스릴 있는 전개, 미장센 등. 이런 부분은 제가 해왔던 일이니 오페라 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선웅은 현재 공연계가 가장 사랑하는 연출가다. 그의 스케줄은 2018년까지 꽉 차 있다. 다만 그와 오페라의 만남은 몇 가지 물음표를 떠올리게 한다. 연극·뮤지컬에서 그는 ‘고급스러운 B급 정서’의 대가다. ‘각색의 천재’로도 불린다. 배우들의 대사에서 일부러 감정을 빼도록 유도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귀족적·극적이고 원작 한 줄 바꿀 수 없는 오페라와 정반대다. 그는 “고선웅의 B급 정서를 여기에 넣을 수는 없다”며 “베르디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분명히 담아내는 그릇은 다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바깥에 손님이 왔는데 항아리 뚜껑에 음식을 낼 수도, 큰 사발에 담을 수도 있어요. 그건 제 선택이죠. 오페라이니 적당한 중량감은 유지하려 해요. 또 제가 모험할 만큼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둘 사이에서 제 식대로 중도를 찾아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나중에 보면 ‘어 다른데’ 할 것 같아요.”

이번 공연의 또 다른 화제는 음악감독을 맡은 구자범 지휘자다. 일부에서는 고 연출이 예술가로서 개성이 뚜렷한 구 지휘자와 호흡이 맞을지 우려하기도 한다. 고 연출은 “구 지휘자의 음악세계를 잘 도와드리고 싶고 워낙 구구절절 맞는 말씀을 많이 하셔서 저는 그냥 따라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회의하면서 안 맞는 장면이 있어도 서로 푼다”며 “제작진 간 갈등은 무대 예술에서 항용 있는 운명 같은 거고 그 안에서 즐겨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런 자세를 “물 흐르듯 살고 싶다”는 말로 요약한다. 

“물은 그릇에 따라 변해요. 내가 얼음이면 그릇에 빈자리들이 생겨요. 이 빈틈을 어떻게 메울까요. 혼자 시 쓰고 그림 그리면 상관 없어요. 하지만 공연은 협업이에요. 서로 절충하다 보면 각자 얼음이 성기어지면서 빈틈이 채워지는 거죠. 그러니 물처럼 살아야 해요. 만만치 않은 물들이 모여 섞였을 때 무지개색 물이 한 그릇에 담겨 정확한 형태를 이루는 거죠. 연출은 본래적으로 절충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부부생활과 똑같죠. 내가 아내나 남편에게 윽박지른다고 뭘 집안을 잡겠어요.”

색즉시공, 물처럼 되겠다는 그는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도 초연하다. 고 연출은 “칭찬에 포만감을 느껴본 적이 없고 동요되지도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는 “저도 언제든 떨어질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넌 떨어져. 기분 좋게 살아, 다행이네’라고 여긴다”며 “중요한 건 내가 계속 재밌어하는 마음이 있는가이고, ‘맥베드’도 내 심장 속에 해보고 싶은 열정이 생겨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도 많이 받아봤지만 마음속에 교만이 차오르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 일은 늘 새로워요. 직전 작품을 잘 해도 다음에는 멤버와 프로덕션이 다 달라져 쉽지 않아요. 매 순간 시한폭탄 같은 문제가 돌발할 수밖에 없어요. 물처럼 살지 않으면 반드시 어디선가 사달이 나요. 모두가 함께 하면 할수록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독단적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죠. 사람은 기대 사는 거니까.”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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